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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은 뒤로…앞길엔 여명이… 「80년 막차」에 꿈 실어-철마와 함께 25년…기관사 박홍용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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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듀-80년』경신년이 저문다. 격동과 시련의 한해. 모두의 가슴에 간직된 희로애락(희로애락)의 숱한 사연들이「과거」란 이름에 묻히는 순간이다. 『뚜-』. 만남과 헤어짐, 슬픔과 기쁨의 인생유전(인생유전)을 실어 나르던 철마도 가는 해를 뒤로하고 여명(여명)의 새아침을 향해 어둠을 달린다. 서울역 밤11시30분. 광주행 호남선 막차(특급213호)가 「아듀」의 기적을 길게 울린다. 4반세기를 철마와 함께「레일」위를 달려온 기관사 박홍용씨(50·전북 이리시 창인동2가1). 서서히 어둠 속으로 남행열차의 「키」를 누른다. 지난 반평생 파란 많은 이 땅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이 되어온 박씨.
박씨는 올해도 8량의 열차에 초만원이룬 6백여명의 마지막 귀성객을 싣고 떠난다.
그가 철도에 첫발을 디딘 것은 25세 때인 1955년. 『칙칙폭폭』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수입 유연탄을 쓰던 석탄차 시절.
달리는 기관차에 불을 때는 「고네수」로서 철도와 첫 인연을 맺었던 박씨는 그 후 유연탄이 국산 무연탄으로, 다시 60년대초 「디젤」로 바뀌는 동안 철마의 변천사와 더불어 삶을 같이해온 우리 철도사의 산증인이다. 『석탄차를 타고 다닐 당시고생이 많았지요. 열차가 굴속을 한번 지나고 나면 기관사들은 온몸이 온통 그을음 투성이였어요.』
박씨는 당시 기관사를 보좌하는 「고네수」「기관조사(조사)」였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 때에는 굴속에서 질식해 죽는 기관사마저 있었다고 했다.
62년9월 박씨는 정식기관사로 발령을 받았다.
호남선은 박씨가 18년간을 하루같이 맡았던 단골주행구간.
눈을 감아도 점자를 읽듯 천리길이 환히 보인다.
협곡(협곡)간이역의 외등하나, 풀 한포기까지 박씨의 눈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는 주행기록 77만㎞의 고참기관사.
완행열차에서부터 화물차·보급·특급, 그리고 호화객차라는 새마을호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관차가 없다.
기관사를 천직으로 알고 정열을 쏟는 동안 박씨는 또 숱한 「순간」들을 맞았었다.
자신이 모는 열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 여성도 있었다.
또『아차』하는 실수로 생명이 끊기거나 부상을 했던 어린 목숨도 있었다.
그때마다 박씨는 자신이기관사라는 사실을 비통해했다.
불의의 사고가 눈앞에 닥쳐 일단 비상제동을 걸었을 순간에는 오직 「하느님」을 찾았다. 지금도 조종간을 잡을 때는 언제나 무사를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박씨는 이 때문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한다.
『작게는 내 가정, 크게는 국가를 위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78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는 마침 폭발순간 2시간여 앞서 출발한 서울행열차에 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옛일이지만 기관사가 된지 2년 뒤인 64년 가을에는 석탄 차를 몰던 중 충남연산에서 바퀴의 겉면 1개가 떨어져 탈선직전인 것을 발견, 대형사고를 막기도 했다.
박씨는 이때 처음으로 철도청장상을 받았다.
그 후 수없이 많은 각종표창과 상을 받았지만 이것이 가장 기억에 새롭다고 했다.
77년 새마을호의 광주∼서울간 개통식때에는 시운전 기관사로 발탁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박씨의 하루주행시간은 평균 6∼7시간, 한달에 최소 1백인시간은 기관사로서 일해야한다.
이 6∼7시간을 위해 충분한 수면을 해야하고 출발전 1∼2시간씩의 세밀한 기관점검을 마쳐야한다.
잠이 부족하면 특히 시계(시계)1백여m밖에 안 되는 야간 운행 때에는 크게 곤란을·겪게된다.
이렇게 해서 받는 월급이 각종수당을 합쳐 30만원선.
이것도 처음 기관사 출발당시 몇 천원 하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향상된 것이다.
다행히 3남1녀의 자녀들이 모두 장학생으로 공부를 잘해 장남 범수(26)·2남 범영(24)군은 어엿한 대학생(전북대학)으로 성장했다.
『열차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지요.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그들의 발걸음과 표정은 언제나 같은 것 같아요.』 경신년의 서울을 뒤로하고 기적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열차 속에서 박씨는『언제나 그들의「발」이 되겠다』며 웃는다. <이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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