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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림」속의 삶|하인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거북선」을 즐겨 피우다가「태양」으로-그것도 곽「태양」이 한결 산뜻하고 제 맛이 났다-그러다가 요즘「솔」의 애연가로 바꿔지게 되었다.
그런데「솔」을 뜯을 때마다 어떤 씁쓸한 느낌을 씻지 못하고 있다. 왜 깨끗한 빨간색을 죽은 핏빛의 빨강으로 색 순도를 낮추고 말았을까.
색이란 개념이기 이전에 세계공통의 시각 언어다. 남과 빨강의 순연한 색의 이중주로 된 우리의 태극기는 얼마나 강렬하고, 역동적인가.
나는 요새 뭔가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는 것들이 있으면, 갈구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솔」담배의 맛도, 그 포장과 더불어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있길 바라고 있다. 예부 터 있어 온 무수한 담배 이름들을 떠올려도 본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담배이기도 하지만 그 이름, 그 맛은 그대로 지금껏 있어도 좋으련만….
발 밑에 바스러지는 낙엽이 없어도 도심지의 드 넓힌 보도를 거닐기란 제멋이다. 그런데 나는 그 보도「블록」을 밟을 때마다 입맛이 쓰다. 엊그제 깐「블록」이 들쭉날쭉, 깨어지고 패곤 하는데 도시 이유를 모를 일이다.
한번 깔았다 하면 백년 이백 년은 지탱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신중한 공사는 할 수 없을까.
세상이 덧없고 불변의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결같은 것, 변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너무 정제되지 못한「날림」속에 살고 있는 듯 싶을 때가 있다. 한번 정한 일, 한번 만든 것은 좀 더 오래오래 그대로 지탱이 되게 정성을 다했으면 한다.
어느 지상에서 보니 서울의 지물포에서 2년 전의 벽지「패턴」은 구할 수가 없더 란다. 그만큼 유행에 민감해서일까. 유행 따라 허겁지겁 쫓아갈 것만 아니라 좋은 그대로 항상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한다.
남들이「버스」타야 한다니 나도 놓칠세라「버스」를 타는 게 중요하지 않다.「버스」의 행 선이나 알고 타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전위를 하니 나도 해야 한다고「버스」에 편승하며, 지표 없이 떠드는 날림 전위화가들도 있다. 새것, 새것하고 모두가 눈이 뒤집히고 보면, 헌것을 지키는 그자만이 때론 새것으로 빛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날림이란 주체성 없음에서이며, 대개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쓱싹해 치우고 눈앞의 먹이만 챙기는 얕은 생각.
불교에선 진심과 여래는 동의어로 친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이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을 여래-진심이라 한다. 또는 부처라고도 한다.
진심이 발동할 땐 날림은 맥을 못 추고, 오래오래 시들지 않는「정제」가 남는다.
참된 것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너무 매사에 조급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긴 안목으로 내다 볼 투시력을 가졌으면 한다.
날림·날조·위장의 겉치레 장막은 말끔히 거두고 오래오래 남을 참의「정제」를 위해 말뚝을 박아야 하겠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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