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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 앞에서 하나 된 천민·양반 … 목숨으로 복음 전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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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10면

1 한국 최초의 순교터로 알려진 전동성당의 모습. 2 성당 지하에는 윤지충과 권상연 등 순교자들의 피가 묻은 돌이 놓여 있다. 3 충남 홍성에 있는 홍주 옥터에는 당시 형장을 재현한 모형집이 들어섰다. 4 백정 황일광이 순교한 지점에는 참수순교터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남아 있다. 박종화 인턴기자 [중앙포토]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시복(諡福) 미사를 집전한다. 19세기 초 박해를 받고 순교한 교인들을 복자(福者)·복녀(福女)로 추대하는 것이다. 복자·복녀는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가톨릭 교회에 의해 공식 선포된 사람을 일컫는다. 이후 시성(諡聖)이 되면 성인·성녀가 된다. 1984년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찾아 103위의 시성식을 치렀다.

[14일 교황 방한] 124위 시복, 그들의 이야기

 이번에 시복되는 대상은 모두 124위(位)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형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백서(帛書)’로도 널리 알려진 황사영(알렉시오), 한국 첫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 등이 이름을 올렸다. 124위에는 옹기장이인 이도기(바오로)와 궁중 나인 강경복(수산나)·문영인(비비안나), 관아 아전이던 박상근(마티아)과 악사(樂士) 지황(사바) 등 양반 출신이 아닌 순교자들도 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가리지 않고 자생적으로 피어난 한국 천주교의 기반을 살피기 위해 중앙SUNDAY는 주요 성지를 직접 방문해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 각 성지 성당 소속 해설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홍주 성지엔 석 달 새 2200명 순례
124위 가운데 조선시대 계급으로 치면 황일광(시몬)이 가장 밑바닥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황일광은 백정이었다. 김훈의 소설 『흑산』에 나오는 젓갈 장수 강사녀, 말을 끄는 마노리, 옹기를 굽는 김개동 등 당시 사회 계층의 밑바닥에 있던 신앙인들보다도 더 낮은 천민이었다. 충청도 홍주(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802년에 순교했다.

 황일광이 순교한 충남 홍성군 홍성읍의 홍주 성지를 7일 찾았다. 이 지역에서 순교한 사람은 고증된 인원만 212명이다. 전국적으로 치면 충남 공주 다음으로 순교자 수가 많은 곳이다. 성지순례의 기점인 홍성 홍주성지성당은 10평 남짓 되는 작은 상가 공간이었다. 김한용(시몬) 홍주성지성당 해설자는 “성지 순례자가 늘어서 홍성성당과 별도로 지난 3월에 새로 만든 공간”이라고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2200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성지순례를 하려면 모두 여섯 곳을 돌아봐야 한다. 찬찬히 다 도는 데 차로 2시간이 걸린다. 이 가운데 황일광이 숨을 거둔 곳은 홍성읍 도심을 흐르는 월계천변이었다. 며칠 전부터 내린 비로 강물이 세차게 흘렀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까지 이 강 옆에는 참수터가 있었다고 했다.

 천민으로 멸시를 받던 백정 황일광은 우연히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웠다. 난생처음 자신을 평등하게 대하는 양반들을 보고는 “내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는 게 분명하다”고 읊조렸다고 한다. 신앙이 더욱 깊어진 뒤에는 한양에 있는 정약종을 찾아가 그 집의 일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황일광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는 그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압송되던 때 한 말이 유명하다고 했다. 신유박해 이후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포졸에게 잡혔는데, “남원 고을(나무를 베던 숲을 비유)에서 옥천 고을(감옥을 비유)로 인도해주시니 황송하고 기쁩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그만큼 쾌활하고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황일광은 자신의 고향인 홍주에서 참수됐다. 물가 옆 참수터에서다. 당시 조정에서 “고향에서 목을 베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고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홍주 성지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복자 예정자는 원시장(베드로)이다. 그는 홍주의 첫 순교자다. 55세 때 천주교를 처음 접한 원시장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보약을 가져왔다”며 주변에 천주교를 소개했다. 30가구가 그의 말을 듣고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1791년 신해박해로 원시장의 사촌형 원시보(야고보)가 체포 대상에 올랐다. 원시보가 다른 곳으로 피신하자 원시장이 대신 잡혀갔고, 원시장은 “배교할 수 없다”며 끝까지 고문을 버텼다고 한다. 등뼈가 으스러져 겉으로 드러날 정도가 돼서도 원시장은 옥졸과 포졸에게 교리를 설명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등뼈 으스러지며 신앙 지킨 원시장
원시장은 얼어죽었다. 한겨울, 호되게 매질을 당한 뒤 결박당한 원시장은 물에 흠뻑 젖은 채 밖에 내쳐졌다. “나를 위해 못 박히고 매 맞으신 예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당신께 봉헌한다”는 말을 남기고 순교했다고 한다. 그가 숨진 옛 옥터 자리엔 홍성지청 건물이 있었다고 했다. 검찰청사가 2005년에 이전해 지금은 이 자리에 옛 옥터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한국의 첫 순교자는 윤지충과 권상연이다. 이들의 동상이 있는 전주 전동성당은 한국의 첫 순교터로도 유명하다. 지난 6일에 찾은 전동성당은 신도와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이들의 동상은 성당 정문 맞은편에 있다. 권상연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윤지충은 칼을 쓰고 앉아 권상연이 든 십자가를 보고 있다. 둘은 사촌지간이라고 했다. 순교할 때 피가 튀었던 돌은 현재 성당 지하에 보관돼 있다.

 윤지충이 참형을 당한 것은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였다. 일찍이 집안 전체가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는 “제는 천주교 식으로 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1791년 5월 권씨가 사망하자 윤지충은 유언을 받들어 집안의 신주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를 올리지 않았고, 유교 질서를 교란시켰다는 이유로 전라감영에 체포됐다. 외가 사촌 형인 권상연도 함께였다.

한국 첫 순교는 ‘어머니 제사 거부’ 때문
가족들은 “죽은 자가 왜 제사 음식을 먹겠느냐”며 반발했고, 그게 전라감사의 화를 더욱 돋우는 일이 됐다. “전라도 지방의 천주학쟁이들 때문에 제사가 없어질 것 같다. 윤지충을 극형에 처하게 해달라”는 상소는 정조에게 올라갔다. 거듭 상소가 올라온 지 6개월 만에 정조는 사형을 명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령이 어명을 받들어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정조는 “해남 윤(尹)씨를 절손하려 하느냐”는 고산 윤선도의 꿈을 꾸고는 “사형 대신 귀향을 보내라”고 다시 명을 내렸다. 하지만 새 명령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윤지충과 그의 사촌 형은 목이 잘렸다고 한다. 유철종(라우렌시오) 전동성당 해설자의 설명이다.

 윤지충의 목을 베던 망나니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기쁘게 주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예수 마리아를 믿으라. 하늘에서 형제자매가 되자. 하늘은 평등한 사회다”라고 외치며 형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 순간 망나니에게 성령이 임했고, “이분은 거룩한 분이다. 죽일 사람이 아니다”라며 울며 칼을 갈았다는 것이다.

 형을 집행한 뒤 망나니는 그들의 피가 묻은 삼베 수건을 집에 보관했는데, 이후 이 집안만 역병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천주교로 개종한 그의 후손들이 박정일 주교(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에게 와서 “기적이 있었다”며 증언한 내용이라고 했다.

 신학자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는 증언에도 주목한다. 당시 한국에 천주교가 전해지는 데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영향이 컸다. 『천주실의』는 전통 유학사상에 이해가 높은 중국 학자와 가톨릭 철학에 능한 서양 학자의 대화로 구성됐다. 서문부터 ‘천주는 상제다(天主何 上帝也)’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유교의 절대자인 상제(上帝)와 천주(天主)를 동일시해 유교 문화권에서도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 교리체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주는 곧 예수라고 봤다는 것이다.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윤지충·권상연의 천주사상과 영혼관’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를 호칭했다는 것은 교단의 기도문에도 이미 익숙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정약용 가문선 5명 시복·시성
최초 순교자에 대해선 논란도 있다. 조선시대 역관인 김범우(토마스)가 윤지충보다 6년 앞선 1785년에 유배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중인이던 김범우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알려진 이벽과 어울려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자신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개최했다가 발각돼 체포됐다.

 양반인 친구들은 풀려났고 자신은 고문을 받고 유배돼 상처에 독이 퍼져 숨을 거뒀다. 교회에선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은 김범우 대신 신앙을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사형당한 윤지충을 첫 순교자로 보고 있다고 했다. 김범우는 이번 시복 124위에 오르지 않았다.

 124위의 명단을 살펴보면 가족으로 묶이는 순교자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가문이 정약현·약종·약전·약용 4형제의 나주 정(丁)씨 집안이다. 정약종과 그의 장남 철상(가롤로)은 이번에 복자로 추대된다. 앞서 부인 유조이(체칠리아), 차남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는 1984년에 성인으로 추대됐다. 가족 다섯 명 모두가 시복·시성된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안도 복자·복녀로 추대된다. 전주 제일가는 부자였던 유항검은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체포됐다. 능지처참형을 받아 순교했다. 본인을 비롯해 아들 중철(요한)·문석(요한), 며느리 이순이(루갈다)와 조카 유중성(마태오), 며느리의 오빠인 이경도(가롤로)와 동생 이경언(바오로) 등이 124위에 들었다.

 한국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주문모 신부다. 124위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이다. 중국 쑤저우에서 태어나 구베아 주교의 명을 받고 조선으로 왔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6년 동안, 신자는 1만 명으로 늘었다. 신유박해 때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받는 모습을 보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수를 결심했다고 한다. 문초를 받으면서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서울 서소문 성지에선 평신도들 순교
9일 찾아간 서울 서소문 순교성지에선 순교자에 대한 해설자의 설명이 한창이었다. 신자 20여 명은 거대한 형틀 세 개를 세워 놓은 형상의 ‘현양탑’ 앞에서 참배를 했다. 탑 중앙엔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마태오복음 5장 6절의 말씀이 써 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다 순교한 신도들을 기리는 말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릴 124위 순교자 시복식에 앞서 이곳 성지를 찾는다.

  정약종과 황사영, 한국교회 첫 여성회장인 강완숙 등 시복 대상자 27위가 이곳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신유박해 초기엔 지도층 신도들을 주로 처형했지만 이후 처형된 이들은 대부분 평신도였다. 이번에 복자로 추대되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들은 주로 서울 이촌동 부근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일반 백성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장도 인근에 있는 데다 재판을 하던 형조도 가깝고, 서소문이 시구문(시체가 나가는 문)이어서 형장으로 적합한 곳이었다고 했다.

유재연 기자, 홍성·전주=박종화 인턴기자 que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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