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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계 파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억대의 거액 계들이 연쇄적으로 깨지는 파동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서울에서는 불경기·자금난을 틈타 영세 상인이나 주부들을 울리는 대규모 계 사기 사건이 잇달아 터지고 있으며, 전남광주에서는 경찰에 신고된 1억원 안팎의 큰 계만 해서 올 들어 30여개나 깨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부인이 경찰에 구속되자 공무원인 남편이 자살한 일이 발생했는가하면, 7만여 원의 곗돈을 못 낸 계원이 독촉하는 계주를 살해한 끔찍한 사건까지 대구에서 일어났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이웃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우리 특유의 미풍양속이라 할 계가 근래에 와서 사채놀이 등 치부·재산 보존의 수단화하면서 가정 파탄·패가망신 등의 갖가지 부작용을 몰고 온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지금까지 낙찰계·번호 계 등으로 서민들을 울린 계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의 계 파동은 한마을, 같은 상가의 영세상인·가정주부 등을 상대로 거액의 곗돈을 빼돌리는데 특징이 있다.
그 동안의 계 사건은 계주가 계획적으로 곗돈을 떼먹고 줄행랑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자금 침체 현상이 심화되면서 계원들이 곗돈 불입을 못해 일어나는 일이 많아 그 심각성이 한결 더한 것 같다.
불경기·자금난 외에 새 정부의 사회 정화 작업으로, 예컨대 인기 있는 과외 교사나 부조리를 저질러온 공무원들의 비정상적인 예상 수입이 별안간 끊긴 데서도 계 파동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요즘의 계 사건은 변혁기에 일어날 수 있는 불가피한 진통이라고 할 수 도 있다.
벌써 수십년을 두고 계 파동이 일어나고 있는데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여건이 투영된 복합적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지만, 사기 등 범행의 무대가 되고 가정 파탄 등 부작용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건전한 사회, 정상적인 사회라면 억대의 거액 계가 성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확천금의 허망한 투기 심리가 전반적 사회분위기를 얼마나 혼탁하게 한 병리적 폐풍이었는지는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다.
돈이란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야만 그 값을 다하는 것이란 인식이 뿌리를 내릴 때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 윤리는 확립되고 건강 사회는 그 기틀이 확고해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계의 성행이 사설 금융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는 역설도 성립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동안 은행의 문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인플레」 심리에다 은행 등 금융기관은 그 문턱이 너무 높다는 거리감 때문에 자금이 급한 영세 상인들은 사채시장에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사기 등의 위험 부담을 뻔히 알면서 이율이 엄청나게 높은 이른바 「일일 계」 등이 성행했던게 아닌가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계를 인한 말썽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지향하는 새 시대에는 계를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따위의 폐풍은 반드시 일소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당국으로서는 계 성행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살펴 알뜰 저축의 기품 조성 등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영세 상인 등 서민 생활의 안정이란 측면에서 금융 기관에 대한 일반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인 정책적 배려가 아쉽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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