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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9)제70화 야구에 살다(18)평양의 "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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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이외의 각지방야구는 평양에서 맨 먼저 시작되었다. 당초 선교사「길레트」가 서울로 부임하기 전 북괴에서도 기독청년회 권들에게 「캐치·볼」정도를 소개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l909년 동경유학생「팀」이 평양에서 두 편으로 나뉘어 시범을 보인 직후 안창호 선생이 1906년에 설립한 대성학교와 숭실학교에 비로소「팀」이 생겼고 이때부터 정규「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숭실학교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지도되었고 대성학교는 제1차 동경유학생야구 「팀」의 일원으로 왔던 조기풍 김현재 김질영 김관호가 그대로 눌러앉아 「코치」겸 선수로「팀」을 만들어 이끌었다.
그래서 1912년 제2차 동경유학생 「팀」이 왔을 때 대성은 투수 이시태 포수 김영윤 유격수 조기풍을 중심으로, 또 숭실은 서양인 선교사들에다 한인으로는 이석부 장병열 등이 가세한 채 대전할 정도로 성장했다. 대성은 그 이듬해 안창호 선생의 상해망명으로 폐교되었다.
1918년10월에 벌어진 한인 「팀」인 전숭실과 일인들의 평양 「유니온」 (전평양)의 대전이 평양야구사에 특기할만한「이벤트」다. 북괴 「유니온」은 동아연초·동양척직·은행단의 혼성인 강「팀」이었다.
숭실대학생 중심인 전숭실은 차재과 (유격수) 김기환 (우익수) 김태구 (포수) 이석하 (3루수) 조기풍 (투수) 정태정 (1루수) 이혜진 (좌익수) 이양식(2루수) 이겸호 (중견수) 가 「베스트·나인」. 이 경기가 한인과 일인들의 응원전으로 불꽃을 튀겼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히 민족의 영예를 건 결사의 총력전이었다.
경기는 막상막하, 선공의 숭실이 1,2,3회에 1점씩 얻은 반면 전평양은 1회 2점,2회 2점,3회 3점,4회 1점,5회 2점등으로 쾌조를 보이다 숭실이 6회에 대거 7점을 잡아 10-10동점. 난타에 수비실책 투성이의 난전이었다.
전평양은 다시 6, 7회에 모두 3점을 추가, 계속 도망치기를 꾀했으나 끈질긴 숭실은8회 2점 만회에 이어 9회 초1점을 더 얻어 13-13의 두 번째 「타이」를 이뤘다.
여기서 기어이 사고가 났다. 비록 2사후였지만 숭실은 기세가 올랐고 전평양은 역전패의 위기감에 사로잡힌 상황이었는데 숭실의 타자주자가 또 아슬아슬한 내야안타를 치고 진루하자 전평양은 「아웃」이라고 심판에 생떼를 썼고 이를 기화로 양편의 응원만이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를 이룬 가운데 옥신각신을 거듭했다.
결국 다분히 일인들의 의도대로 이것으로 경기는 중단, 무승부로 대열전의 막을 내렸다.
1911년에 강의원이라는 계몽단체의 발족으로 시민대운동회가 개최되어 비교적 체육보급이 빨랐던 대구에서는 1914년 역시 동경유학생 「팀」의 방문으로 야구가 시작되었다.
1915년에는 한일 간의 대전 중 심판문제로 양편의 충돌이 야기, 일인선수가 방망이로 한국인 관객 윤홍렬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 도화선이 되어 분격한 한인들이 본부석을 습격, 수라장을 이루고 일인들은 시내의 상점 문까지 걸어 잠그며 피신을 하는 등 험악한 사태를 빚었다. 이 사고는 일인경찰서장이 선수들과 함께 강의원에 나와 사과함으로써 일단락 되었으나 얼마 후 그 보복으로 강의원을 해산, 한인들의 체육활동에 쐐기를 박았다.
대구야구는 이후 1920년에야 대구청년회가 창립되어 운동부의 김종현 박긍진 손만수 정학준 김동학 최학득 장만호 정원저 김영규 이창달 마달출 이경진 이쟁범 김인출 등이 축구와 함께 야구단을 조직, 마산·창령 등지와 교류함으로써 재기했다.
1921년에는 계성학교와 칠성동 철도구장에서 불교청년회·해성체육관·체진단 등 3개 단체의 소년단 대항 야구대회가 열려 야구발전의 기틀이 되었고 이듬해대구달동협회(회장 박기돈·부회장 서상일)의 창립 첫 기념사업으로도 소년 야구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외에도 곽상동이 조직한 한용단의 인천, 송부고보의 개성, 일인들이 많았던 부산과 마산 및 원산 등지가 일찌기 야구가 성행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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