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집단 따돌림, 그 뿌리를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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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일러스트=강일구]

누가 왕따를 만드는가
아카사카 노리오 지음
최지안 옮김, 유아이북스
320쪽, 1만4500원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라는 일본영화가 있다. 1969년부터 95년까지 총 48편이 만들어진 장수 시리즈다. 내용은 매번 비슷하다. 도라지로라는 남자 주인공이 좌판 행상을 하며 전국을 떠돈다. 우연히 찾은 마을에서 마음을 빼앗기는 여인을 만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낙심해 다시 길을 떠난다. 서민들의 정과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칭송받지만, 저자는 따뜻함과 유머 속에 은폐된 진실을 읽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 영화는 평범한 삶에서 뒤쳐진 사람이 공공의 희생양이 돼가는 과정을 그린, 즉 공동체에서 튕겨져 나온 ‘왕따’의 사연을 아름답게 포장한 잔혹한 이야기일 뿐이다.

 일본에서 집단따돌림(이지메·왕따)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79년,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왕따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해 84년에만 초등학생 1명과 중학생 6명이 자살했다. 학교에서의 따돌림 문제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이 즈음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예전의 왕따가 주로 1대1의 관계에서 이뤄졌다면, 80년대 이후에는 한 사람 대 집단, ‘전원일치의 의지로 바쳐지는 산 제물’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유는 뭘까. 사회학자인 저자는 79년부터 법제화된 양호학교(장애아의 교육을 위해 일반학교와 분리된 형태로 설립된 학교)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분석한다. 신체·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공식적으로 일반 학교에서 배제시키면서, 학교는 ‘건강하고 평범한 아동’이라는 규격에 맞는 아이들만 모이는 장소가 됐다. 학교는 균질한 아이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장이 되고, 집단의 동질성을 해치는 아주 약간 다른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된다. 부정적인 특징(더럽거나 공부를 못하거나 약한)뿐 아니라 긍정적인(너무 예쁘거나 부자이거나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특징까지 공격 대상이 되는, 누구도 도망칠 길이 없는 왕따 게임이 정착된 것이다.

 책은 왕따 문제를 단지 학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킨다. 도시의 이질적인 존재인 노숙자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사회에서 고립당한 이들이 벌이는 묻지마 범죄, 장애인 시설 설립 반대 등에서 모두 ‘배제를 위한 폭력’을 읽을 수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에도 왕따라는 이름의 배제현상이 만연한 듯 하다. 한국에서 늘고 있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과 배제도 일본과 매우 닮아있다”고 썼다.

 현상 분석은 탁월하지만, 똑 떨어지는 해결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은 듯 하다. 저자는 공동의 희생양을 찾는 왕따 게임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인간은 이방인과의 만남을 통해 내재되어 있는 타인을 발견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나와 다른 존재와의 만남은 자아의 폭을 넓히며, 이런 경험을 통해서만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진다.

이영희 기자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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