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신고와 무고의 누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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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리에 맞지 않는 진정이나 신고가 늘어나고 심지어 형제끼리 다툰 것을 폭행으로 신고하는 각박한 세태가 각종 민원창구에 반영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검찰·경찰 뿐 아니라 최근 많이 생긴 각종 신고「센터」에 접수되는 민원내용을 보면 자기과오를「메이커」에 둘러씌우는 불량품 고발, 상호간의 양보나 대화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사소한 문제의 진정, 나아가 남을 모함하는 무고, 형제·친구간의 언쟁 끝의 고발 등 각가지 억지신고가 절반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 바람에 서민의 변의를 위해 마련된 민원창구가 오히려 일더미에 묻힌 관계 당국의 바쁜 일손을 더욱 바쁘게 하고 국민간에 불신을 조장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옆집 애가 시끄러워도 고소를 한다든가, 사소한 교통규칙위반이 목격자에 의해 고발되곤 한다는 구미의 얘기를 흔히 듣지만 유교 영향을 깊이 받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이런 억지신고가 많아진다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는 시민의 고발정신이나 매사를 법에 의해 해결한다는 「법의 생활화」, 또는 근대적인 의미의 계약정신과도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이 같은 서구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전통적 가치관의 혼재와 갈등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사회현상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으며, 유독 요즘 들어 이런 현상이 급증하는 것은 최근의 불황이나 과도적 상황의 한 반영이라고 풀이됨직하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양식은 아직도 일러바치기나 고자질하는 행위를 가장 천하게 보고 분쟁을 법 앞에 들고 나가는 것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다. 옛부터 있어온 『송사하는 집안, 잘되는 것 못 봤다』는 말이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을 지배한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산업화·도시화가 급격히 추진되면서 이런 전통적인 관념의 일각이 조금씩 무너지고 그렇다고 건전한 구미의 가치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하면서 지나친 소비풍조와 물가우월주의의 경향이 대두됐으며 그 폐해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전통적·「인포멀」한 그것보다도 거래중심의「포멀」한 관계가 점차 많아지고 그에 따라 이익이 생기면 더 좋은 사이가 되고 손해가 오면 단절되거나 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비곡직은 흔히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어 자기과실은 작게 보고 남의 잘못은 확대 해석하기 마련이다. 또는 사태의 과정마저 왜곡하여 자기이익을 관철하려는 충동을 받게 된다.
이른바 억지신고나 무고 따위의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보며, 따라서 이런 행위는 단속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단속보다는 오히려 최근 당국이 전례 없이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사회정화운동과 같은 방법으로라야 이런 불신요소는 근본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도 정화의 시의성이 느껴지지만 요컨대 건전한 가치관과 사회기강의 확립으로써만 이런 불신요소도 색원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따위 억지신고와 같은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부분적 현상이요, 일시적인 세태 반영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대부분 국민은 흔들림 없이 건전한 윤리관과 행동규범에 충실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런 대다수 국민을 보호·격려하기 위해서라도 일부의 불신풍조는 하루빨리 삼제될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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