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레이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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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 영화엔 한가지 공통된 특색이 있었다. 구성은 어찌되었든, 시원시원하고 「스마트」하며, 결말은 으례 「해피·엔딩」이다. 「휴머니즘」의 정취, 명쾌한 권선징악도 매력이라면 매력이 있다.
그러나 요즘의 미국 영화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악의 편을 드는 형사도 있고, 「마피아」의 의리를 돋보이게 하는 영화도 있었다. 가족도 따뜻하고 애틋한 모습으로보다는 지치고 메마른 인간 생존의 현장으로 조명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자신과 활기에 넘친, 옛날의 미국이 아닌 것 같다.
요즘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도 그 영화 자체보다는 미국의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 있다.
「애드맨」 (광고인)으로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더스틴·호프먼」, 소외와 무관심 속에서 인간 선언을 외치며 가정을 뛰쳐나가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메릴·스트리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6살의 남아.
그런 와중에서 이 철부지 아들은 아버지 「크레이머」 (호프먼)와 함께 산다. 이들 부자의 관계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제목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스트리프」가 「자립」을 성취하자 그녀는 어머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아들 「크레이머」를 자기 곁으로 데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끝내는 법정의 판결까지 받게 된다.
미국에는 지금 이혼 부부의 자녀가 1천2백만명이나 있다고 한다. 한 해에 그런 아이들이 1백만명씩 늘어난다.
이혼은 성인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정신 건강·인격 형성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크레이머』는 이런 문제에 아무런 대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옳은 사람도, 그른 사람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어쩌면 모두 패자의 입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크레이머」 소년은 어머니 집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미국 사회에선 과연 그것이 합당한 판단이냐에 논란이 분분하다. 「부자 가정」도 있을 수 있다는 논리인 것 같다.
그런 논란의 향방은 사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현대는 가정의 위기를 연출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우리는 색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원작자 「A·코먼」은 자신의 작품을 얘기하며 『남성도 나쁘지만 여성도 나쁜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역시 가정을 보는 그의 눈은 여전히 도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영화 『크레이머』는 오히려 현대인의 가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가정본래의 의미에 향수를 갖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영화가 감명을 줄 수 있다면 오히려 그런 여운 때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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