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을 것 다 겪은 신문, 이제는…|전직 언론인이 한발짝 떨어져서 본 신문-이성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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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문을 펼친다. 지면 가득히 들어찬 기사. 신문 8「페이지」가 좁다고 여백도, 긁힌 데도 없이 꽉 찼었다.
「10·26」전, 그러니까 70년대의 신문들이라고 해두자. 그 세월의 신문도 크고 작은 제목, 길고 짧은 기사가 백이면 백날 어우러져 박혀 나왔다. 그런 대로 모양을 갖출 것은 다 갖췄으니 체재 좋고 인쇄도 좋고-말하기 어려운 세월이라 튀어나온 말이『거 신문 한번 깨끗하다』『이 기사는 보류』『이 부분은 삭제요』.
「보류」는 연판에서 전부 깎고「부분삭제」는 그 부분만 깎는다. 인쇄되어 나온 지면을 보면 긁힌 자국이 곰보상이다.
그 후엔「세련」(?)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연판에서 깎고 냅시다.』
『안돼요. 다 메우고 내시오.』
『발송을 못하게 되니….』
『그것은 당신네 사정 아니오.』
사정과 실랑이도 별 무소용. 할 수 없이 판을 다시 짜고 연판을 새로 붓고 신문은 늦어지고 지면은 깨끗해지고-. 그런 일을 겪고 난 다음 모두들 새로운 요령이 생겼을 것이다-여분의 원고준비를 해두었다가 공백을 깨끗하게 메우는 재주들이. 하여간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이것 하나는 갈 지켜져 살짝 얽은 지면도 별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신문사의 문턱이야 워낙부터 낮은 것이 제격이다.「뉴스」를 알려줄 사람, 하소연할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기사에 항의할 사람을 위해서도 낮을수록 좋다. 그러나 일부 사람에게는 높아서 나쁠 것 없고 높기도 했다. 적어도 60년대 초입까지는 그런 것으로 알았다. 그렇던 것이 그 후 어느 사이엔가 이런 분별을 차릴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어수룩한 점이 없지 않았던 그전 사람들과는 성큼 들어서는 방법부터 달랐고 그러다 보니 이미 안에 들어서 있었다고나 할까 턱이 없는 문은 이미 문이 아니었다.
비바람은 갈수록 드세게 휘몰아쳤다. 겉으로 나타나게 불어닥친 첫 파동이 언론윤리 위원회법. 64년의 일이었다. 그런 대로 언론계 전체가 들고 일어나 편법이나마 자율규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가라앉았다. 그 다음 번이 71년도의 국가 보위법. 이때부터는 많이 수그러들기만 하였다. 72년에는 유신, 75년에는 긴급조치 9호. 하고 싶은 생각만 국민이 할 수 있었다.
독자의 입장에서야 그래도 신문이 바른말을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렇다고 희생자나 사운을 걸고라도 하지 않느냐고 까지는 요구하지 못하는「앰비·밸런스」상태에 있었을 것 같다. 동시에 동일대상에 대하여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끼는 정신상태였다.
기자에게는 쓰는 자유가 으뜸이다. 그렇지만 안 쓰는 자유도 있어 마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안쓰는 자유가 보다 소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문이 받을 수 있는 압력의 대표적인 것은 못쓰게 하는 것이다. 못쓰고 못 싣게 하면 당장은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면이 무기력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별로 그런 만한 이야기도 아닌데 어엿하게 실려있는 것을 때로 구경해야 했다. 아무리 억지가 센 권력도 안쓴다고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니 이런 것은 미리 알아서 모신 것이었을까. 혹시 억지가 심하다. 심하다면서 한술 더 뜬 경우는 없었을까.
사회는 변한다. 독자도 변한다. 신문도, 신문문장도 변한다.
앞을 향하느냐 뒷걸음질치느냐에 차이가 생긴다. 정론지 시절도 있었고 시원하게 두드리는 필주시절, 언론 만발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좌절과 자조·순치의 세월도 겪었다. 지금은 너무도 오랫동안 길이 잘 들여져 모두들 걱정하는 계절인가 보다.
지금도 문제이겠지만 어느 때나 문제는 있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던 시절, 마음대로 휘두르던 시절, 그때는 그때대로 걱정은 있었다. 바른 말도 하다보면 책임도 흐리고 뜻하지 않은 피해를 생기게도 했다. 시절이 그런 때라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이때 스스로 책임을 잘 다스렸던들 얼마 뒤에 독소가 숨겨진 타율의 덫을 벗어날 수 있었을 일이었다(워낙 그런 일이란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긴 하였겠지만).
우리의 신문들은 이 겪을 것, 못 겪을 것을 모두 겪어보았다.
언론의 자유란 민주사회의 원천적이고 상위의 기본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까지 어느 한 사람도『언론을 창달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없다. 다만 한국적 특수상황 때문에 언론이 유보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신문들은 언론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국가 방침, 대외관계. 안보 등엔 인식도 잘되어 있거니와 자율적으로 잘 임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겪은 곤욕이었다. 왜 그랬을까.
개헌을 앞두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헌법상의 언론조항은 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헌법조항이 잘 된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에는 지난날이 너무나 가시밭길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무력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국민들이 언론기관에 신탁한 것이고 그것은 그만한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 언론의 자유는 그런 만큼 그 종사자들이 결연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결코 지켜질 수 없고 지난날은 되돌릴 수 없다 치더라도 그에 다른 사회의 책임도 다해 주어야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듯 완전한 기자, 완전한 신문을 요구할 만큼 독자들이 인색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는데 최상의 노력을 요구해봄직은 하지 않은가. <필자=전 중앙일보사회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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