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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선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민호의윈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52년5월25일 영시부터 계엄에 들어갔는데,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전남순천에서 사건이 발생했지만 계엄실시지역은 전남북뿐아니라 경남등 23개 시·군이었고 그중엔 부산도 포함됐다.
당시 부산에는 거의 매일같이 격렬한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령의 선포를 의결한 23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인국회의원 서민호를 처단하라』 『살인 국회의윈을 우리손으로 처단하자』 『정의의 칼을 뽑아라』 『반민의 국회의원을 국회에서 축출하라』는 「플래카드」가 경남도청·국회의사당·재판소 주변을 뒤덮었다.
서의원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국회에 대해 표시한 이승만대통령의 노골적인 불만과 비판에 이어 소위 반민의 국회의원 규탄 국민대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던 터였다.
이처럼 험난한 분위기 속에서 무시무시한 구호의 「플래카드」를 뒤집어씌운 「택시」4, 5대가 경남 도청을 오가는 전초전을 벌이더니 4, 5백명의 남녀 청년시위대가 도청·의사당·재판소를 포위했다.
정사복 경찰관과 기마 경찰대가 이들을 저지하자 충돌사건이 발생했다. 경찰관과 「데모」대의 중경상자가 80여명이나 되었고 진압지휘에 나선 이동철 경남경찰국장도 머리에 돌을 맞았다.
하루 종일 세차례의 「데모」가 연달아 일어났다. 하오3시쯤 도청앞에 다시 몰려온 「데모」대는 이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요청서, 「진정한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선언서, 「반민의 국회의원」을 규탄하는 선언서, 대법원장에게 보내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는 정부나 국회에서 대변자가 나와 민의에 대해 답변하라고 요구하고 그때까지 연좌시위를 벌이겠다고 버텼다.
정부는 이날하오 국무회의를 소집해 비상계엄선포를 의결한 것이다.
『지난번 지방자치법에 의한 아국 초유의 지방선거실시에 대하여는 최고도의 자유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계엄을 대폭 해제한바 있다.
그 동안 선거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순조로이 끝났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지구에 있어서는 계엄의 해제를 기회로 공산잔비의 출몰이 빈번하고 후방치안을 교란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고있다.
복잡다단한 현 시국은 최단기간 내에 후방치안의 완전확보를 절대적으로 요청하고있다.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으로하되 따로이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는 육군소장 원용덕을 임명한다.』 신태영국방장관의 계엄선포 담화문이었다.
한마디로 계엄선포의 이유가 지방선거가 끝난 것과 공비출몰에 의한 후방치안의 교란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에는 그 당시 소탕할 공비가 없었다. 계엄선포의 의도는 다른데 있었다.
이 박사를 무시하는 듯한 국회가 목표였던 것으로 풀이되었다.
군대 내부에서도 부산에 대한 계엄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경계자세를 보이는 인물이 많았다.
특히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종찬장군은 군의 정치개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시 대구육군본부에서 참모총장으로 근무하고있던 이장군은 부산의 원용덕 영남지구계엄사령관부터 2개 대대의 병력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묵살해버렸다.
이 장군은 병력 요청에 대한 거부이유로 작전지휘권을 내세웠다. 「6·25」동란의 발발에 따라 이대통령은 50년 7월14일 「맥아더」「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공한을 통해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라고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했던 것이다.
이 장군이 병력이동에 응하지 않게 되자 계엄선포 후 이틀째인 27일 이박사는 그를 부산으로 불렀다.
이 장군은 부산역에 마중나온 「벤-플리트」미8군사령관과 함께 부산경무대에 들어갔다.
이장군도, 「벤-플리트」장군도 부대이동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통령은 일부 불순분자들이 국회에서 정치적 장난을 벌이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계속국사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게 갖고있었던 때였으므로 이장군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장군이 그날 이박사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이 그것을 분명히 입증한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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