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헌정 견문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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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스페인>
본래 「스페인」은 예정에 없었는데 「런던」대학 「크리크」교수의 권유로 일정을 변경하여「헬싱키」에서 비로소 「스페인」으로 간다고 연락을 했기 때문에 시간여유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사관에서 「스페인」헌법을 우리나라말로 번역해 놓고있었다.
영문으로 된 것도 없고 해서 그렇게 했다는데 참으로 미안하고 또 고마운 일 이었다.
그 날은 미처 상대방과 약속이 안되어 하루를 쉬기로 했다. 나는 작년10월에「마드리드」에 온 적이 있어 관광은 다 했으나 일행과 합께 다시 「포라드」미술관과 왕궁을 보았다. 전 세계를 한때 제패한 「스페인」의 역사적 업적은 「스페인」을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경도로 웅대한 것이다.
수십 개의 왕궁, 「파리」에 능가하는 「마드리드」의 시가지. 건물, 이런 오래된 미술품이나 건축물을 볼 때 늘 느끼는 것은 우리 조선들은 꽤 그렇게도 가난하게 살았었나 하는 것이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시가지에 즐비한 2,3백년이 경과한 5층 석조건물 하나만을 갔다 놓아도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가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된다.
다음날 오전에 「스페인」의 헌법최고권위자인「모로도」총장을 방문하고「스페인」헌법과 그 실제운영에 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스페인」헌법은「프랑코」정권이 무너진 후 1977년에 제헌국회를 구성해서 1년3개월만에 새 헌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새 왕이 생겼으며 선거에 의해 국회가 구성되어 지금 민주화작업이 진행중이라 한다.
정부형태는 왕정이고 철저한 의원내각제인데 이것은 서독의「본」기본법에 따라 이른바 건설적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다수정당(크게4개)을 토대로 한 의원내각제는 정국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에 차기수상을 미리 선출하지 않으면 국회가 내각불신임결의를 할 수 없는 서독 식 의원내각제를 채택했고 왕이 있고 양원제이기 때문에 이런 점은 영국헌법을 참고로 했다고 한다.
비록 주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민주헌법으로서는 최신의 것이기 때문에 기본권에 있어서 많은 점이 참고가 된다고 생각했다. 환경권·사회보장에 관한 상세한 규정, 또 근로자의 단결권이외에 기업주의 단결권도 헌법에 있었고, 사생아 및 내연의 처에 관한 규정, 주택·문화재에 관해 규정도 들어 있어 최신헌법의 변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카를로스」1세를 왕으로 하고 세습한다는데 현재 「카를로스」왕은 육·해·공군사관학교를 다 거친 사람으로 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한다.
1년3개월의 제헌국회에서 문제가 된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모로도」교수는 지방분권이 제일 문제되었다면서 중도·우파와 좌파간에는 별로 크게 문제된 점이 없었다고 답변했다.
오후에 방문한 하원사무총장 「파우래퀴」씨는 하원의장이 대학교수이었을 때의 수제자로서 공법을 연구한 사람이라 헌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제헌국회 때의 논쟁점이 무엇이냐고 물은 데 대해 이 사람도 「모로도」교수와 비슷한 대답이었다.
학생 「데모」에 대해 물었더니 「프랑코」정권타도 2년 간은 극심했는데「프랑코」정권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2년 간 잠잠하여 민주화를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장재용대사 관저에서 환대를 받은 후 대사관과 하원에서 준 많은 자료를 가지고 마지막 예정 지인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2월3일 토요일이었다.
우리는 예정에 없던 「스페인」을 갔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미리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은 취소해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됐다.
「헬싱키」의 지성구대사가 부탁했던 「외스트엔드·호텔」(실종 전 김형욱 전 중앙부장이 투숙했다는 곳)은 만원이 되어 결국 서울을 떠날 때 대한여행사에서 예약했던 「호텔」로 갔다.
이「호텔」은 별 세 개로 마침 주말이라 시골서 여행 온 여학생들로 혼잡을 이루었고 몹시 소란한 곳이었다.
저녁에 민병기대사의 관저에 초대되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만난 다른 대사들과는 사석에 앉는 것이 처음이었으나 민대사와는 26년 전에 미국「시카고」에서 1년 가까이 같이 지낸 사이라 처음으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음 일요일은「호텔」에서 푹 쉬었다. 여행 중 이상하게도 밤에 잠이 깨어 고생했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낮에도 잤다.
다음날 오전에「마리」대학의 고명한 헌법학자(현재「파리」제2대학명예학장)「브델」교수를 자택으로 방문했다.
2시간이 넘도록 환담하는 동안 이 노교수는 「제스처」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정부형태를 삼정부제라 하는데 대통령과 수상의 권한이 어떻게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는가 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문서상의 규정이고 실제는 대통령이 다하는 것이라 하며 헌법학자들은 법규정보다도 실제운용에 주의해야한다고 말했다.
제3·제4·제5공화국 헌법에 똑같이 대통령이 각의를 주재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제3공화국은 각 장관이, 제4공화국은 수상이, 제5공화국은 대통령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또 현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커서「드골」헌법에 대한 반대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반발은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수상을 바꾸는 것은 위헌이 아니냐는 질문에 「프랑스」헌법학자간에서도 이론이 있으나 자기는「본인이 사표를 내는 점」으로 보아 위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외 여러 가지 문답 중에 노교수는 우리에게 한국산 인삼담배를 몇 번이고 권했다. 우리일행은 2시간이상의 면담을 마치고 국산인삼차와 우표 장을 선사하고 돌아왔다.
오후에는 헌법평의회 「폴렝」씨를 만나러갔다. 「프랑스」의 위헌심사는 추상적 규범통제로서 사전에 필수적으로 하는 심사와 또 대통령·양원의장·일정수의 국회의원의 제청에 의해 심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모든 심사는 공포 전에 하는 추상적 심사이고 공모 후에는 위헌심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핀란드」는 국회 안에 헌법위원회가 있어서 여기에서 문제가 되면 사전심사하고 공포 후에는 위헌심사가 없다. 또 「스페인」은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수상· 국회의원· 자연인· 법인·검찰청의 제창으로 법률의 추상적 규범통제와 기타 소송 중 문제가 되는 법률에 대한 구체적 규범통제 등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게 생각되어있는 법률위헌여부의 사전통제가 이들 두 나라에서는 원칙으로 되어 있음을 알았다.
일원정부제에 관하여 많은 점을 깨달았고 민주화 과정 속에 있는 최신의 민주헌법인 「스페인」헌법에 관하여 많은 자료를 입수하는 등 16일간의 짧은 시일이나마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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