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에 오르기(4) | 김병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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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천문가 『조금 전 혼자 조용히 뭐 좀 생각하면서 망원경에 열중해 있는데 형씨가 내게 와서 슬슬 수작을 걸었지요. 그때만 해도 나는 개새끼 더럽게 노는군, 하고 화가 났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얘기를 붙여와도 난 절대로 상대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어쩐지 형씨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업자 『내게…감사한다고요? 뭘 말입니까?』
천문가 『나도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히 우린 서로 진실을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고, 난 분명한 이 사실이 유쾌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놓고 얘기 좀 나눌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듭니다.』
실업자 『이상하군요. 형씨는 사실 나보다 아는 것도 훨씬 많아 보이고 따라서 나 따윈 비교도 안되게 좋은 생활이 있을 텐데 새벽에 이런 델 나와서 나 같은 사람과 한통속으로 어울려 지껄이는 것이 유쾌하다니 (머리를 갸우뚱하며) 모를 일입니다.』
천문가 『실은 나도 이런 델 나와서 형씨 같은 사람과 만나 이렇게 그럴듯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실업자 『그럼 여긴 도대체 왜 나온 겁니까?』
천문가 『아, 아직도 그 얘길 안 했군요.』
실업자 『그렇습니다. 아직 그쪽으로는 한 발짝도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천문가 『내가 여기 나온 건…, 내가 여기 나온 건 (강을 바라 보며) …그보다 형씨.』
실업자 『말씀하세요.』
천문가 (거의 중얼거리듯) 『지붕 위에 올라 가 본적 있습니까?』
실업자 『뭐라고요? 잘 못 들었습니다.』
천문가 『지붕위에….』
실업자 (어리둥절하여) 『지붕위에?』
천문가 『난 올라 가 봤습니다.』
실업자 『도대체 무슨 얘깁니까? 지붕 위에 올라 간 것하고 형씨가 여기 나온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천문가 『상관이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마치 지붕 위에 오르는 심정이 되곤 합니다.』
실업자 『위험하다는 얘긴가요?』
천문가 『천만에, 편안해진다는 얘깁니다… 알겠습니까?』
실업자 『알겠습니다. (하다가 복잡한 얼굴이 되어) 모르겠는데요, 난.』
천문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까 죽은 그 남자 말입니다.』
실업자 (찡그리며) 『그 사람 얘긴 왜 또….』
천문가 『갑자기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어쩐지 실패한 것 같지 않아요?』
실업자 『실패라고요? 성공이겠지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기 위해서 그 높은데서 떨어졌을 거고…자기 생각대로 되었을 테니까.』
천문가 『아니 내 말은 그런 얘기가 아니고…, 뭐랄까, 그 사람 혹시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꿈꾸느라고 저런 높은 곳을 고른 것은 아닐지….』
실업자 (좀 애매한 표정이 되면서 함구해 버린다.)
천문가 (중얼거리듯) 『가급적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 그것이 퇴원할 때의 내 희망 사항이기도 했으니까.』
실업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 못 들었습니다.』
천문가 『아닙니다. 혼자서 해본 소립니다. (뭔가 다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실업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제어하듯 불쑥) 형씬 말입니다. 형씨가 서울 사람이라는 자신이 있습니까?』
실업자 (어눌하게) 『그야…서울에 살고 있으니까요.』
천문가 『그렇군요. 나도 바야흐로 기운차게 1980년에 들어서고 있는 이 거대한 도시,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실업자 (좀 분명한 얼굴이 되어) 『그럼 형씨도 서울 사람입니다.』
천문가 『그런데…… (수심 띤 얼굴로) 그게 좀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난 늘 그 사실에 의심이 갑니다.』
실업자 『무슨 말인지….』
천문가 (잠시 난감한 표정이 되더니 빨리 빨리 말해 버린다) 『내가 서울 사람인 것은 서울에 지금 내가 살고 있고 서울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걷는 거리를 나도 똑같이 걸을 수 있고 서울의 탁한 공기를 나도 들이켜고 맛없는 수돗물을 나도 마시고 광화문 중앙우체국 근처의 요염한 여자사진과 함께 붙어있는 국산 양주광고를 남들과 똑같이 보며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의심에 빠지게 된단 말입니다. 서울은 유독 서울 사람들로부터 나만을 제외시키려드는게 틀림없다는 못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당당하게 그들의 도시인데 왜 유독 나한테만 그렇지 못한 걸까요?』
실업자 (입을 벌린 채 듣고 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그야 형씨가… (하다가 다시 복잡한 얼굴이 되어) …잘 모르겠는데요, 난.』
천문가 『회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겐 당당하게 그들의 직장일 수 있는 것이 왜 나한테만 그렇지 못한 걸까요?』
실업자 (더욱 복잡한 얼굴이 된다.)
천문가 『집도 마찬가집니다. 아파트의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나는 전신에 힘이 빠지는걸 느껴요. 자신이 마치 외지에서 온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가장 비참한 순간은 바로 초인종을 누르는 그때입니다. 심할 땐 때때로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까지 합니다.』
실업자 (참지 못하고) 『잠깐.』
천문가 『….』
실업자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자는 겁니까? 우린 지금 형씨가 왜 이런 델 나오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씨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만 내 머리까지 복잡해져서….』
천문가 『미안합니다. 지금 그 얘길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여기 나온 것은.』
실업자 『….』
천문가 『그보다 우선, 형씨는 여기 서서 저 건너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몽롱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면 무슨 떠오르는 생각 없습니까?』
실업자 『글쎄요, 별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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