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교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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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새해부터는 잘하면 중고교의 교복이며 교모가 자유화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교육행정의 자율화」를 위한 새 기운의 한가닥 표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일화하나가 생각난다.
「보스웰」이 거울에 비친 자기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아뭏든 내 생김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수많은 부분들이 모여서 됐군. 그렇다면 획일적인 교육이란 어떤 것이든 바람직한 성격을 만들어 낼수는 없다고 추론해야하겠군』하고.
제복은 중세 서양에서는 본래 주인과 하인을 구별하기 위해 하인들에게 입힌데서부터 시작했다.
「헨리」8세때의「런던」에서 도제등은 모두 여름엔 푸른 덧옷을, 겨울에는 흰바지와 양말을 신어야했다.
「에이프런」도 부엌하녀들의 제복의 일종이었다. 제정「러시아」의 하인들은 또 붉은 「사라판」을 걸쳐야했다.
한편 간호원의 제복은 「크리미아」전쟁때「나이팅게일」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의 이유는 순전히 위생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제복을 입히게 된것은 본래는「엘리트」의식을 키우기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가운」이라하면 중세기에는 학원가의 대명사나 다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신교육의 초창기부터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909년의 경신중학교의 졸업식 사진을 보면 졸업생들은 군복 비슷한 「쓰메·에리」, 검정두루마기, 흰한복 바지·저고리등 복장이 가지각색이었다.
한편 20년대의 여학생들은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는게 제복처럼 되었다. 학교끼리의 구별을 하기위하여 치마 아랫단에 흰줄을 두른 학교도 생겼었다.
30년대에 이르러 전문·대학생들이쓴 사각모는「엘리트」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의 학생들은 교복에 다시 없는 긍지와 꿈을 키울수도 있었다.
미투리에 각반을 하고, 도시락보따리와 외투를 양 어깨에 배낭지듯 X자형으로 걸머지고 나팔을 불어대며 수학여행길을 떠나는 10년대의 풍경은 꼭 만화같기도 하다.
당시의 학생들은 그런 교복을 기꺼이 입었다. 학쪽에서도 획일주의나 억제를 위해 그런 교복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말에 이르러는 교복은 순전한 군국주의와 복종의 상징으로 전락되었다.
따라서 교복은 해방과 함께 제일먼저 없어져야 했었다.
그러나 그엄청난 민주화에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교복은 살아 남았다.
지금 자유세계에서 제복이 있는 나라가 더러 있기는 하다. 일본에도 있다. 단 학교마다 교복이 다르다.
다만 어느 학교나 똑같은 검정제복은 우리 나라 뿐이다. 그걸 지금까지 아무도 쑥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는게 이상할 뿐이다. 새 문교장관의 한마디로 쉽게 없어질수도 있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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