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도 현대화…「한글판」유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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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근 들어 「뿌리찾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글판 현대식 족보간행이 부쩍 활발하다.
대개의 족보가 일제때 만들어졌거나 해방직후 간행돼 시대의 변천에 따른 개편이 불가피해졌고 이왕 낼 바에는「한글」세대들도 볼 수 있도륵 하자는 의견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선을 보인 『전의예안이씨족보』는 파보가 아닌 방대한 대동보로서는 처음 현대화에 성공한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75년 이후 몇몇 종친회가 『한글세대도 볼 수 있는 족보를 만들자』는데 뜻을 모았지만 실제로는 한문에 토를 달거나 한자이름에 한글을 병기하는데 그친 실정이었다.
이번에 나온 『전의예안이씨족보』는 원고지 9천6백「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사육배판 양장으로 10권에 모두 담았는데 세계에 나오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은 모두 국한혼용으로 풀어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손이라면 누구나 조상의 이력을 알아볼 수 있도록 꾸민 게 특징이다.
또 여러 차례 중간된 구보의 서문 및 발문, 약사 및 지지, 인물고·국조방목에 실려있는 이 집안의 문과급제자, 비문에 기록된 조상의 행상을 모두 번역, 한글화했을 뿐아니라 찾아보기 쉽도록 후손들의 지역별 인명록을 색인으로 덧붙여 완벽을 기했다.
지난77년5월 대동보 간행위원희(위원장 이신호)를 구성, 착수한 이래 2년여만에 수단이 모아져 내게된 이 족보는 전의예안 이씨종친회회장 이희승박사(학술원회원)의 주장과 구상으로 만들어진 것. 따라서 구보의 번역과 세계의 편찬이 모두 이박사의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내용이나 체제를 대폭 현대화하자』는 뜻에 맞추었다고 실무를 담당한 사무국장 이정호씨는 밝힌다.
최근 나온 족보 중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히 한글전용만으로 이루어진 족보도 3개나 돼 이채를 띤다. 지난 3월에 나온 「고흥류씨검상공파세보」를 비롯, 「한산이씨사복사정공파보』「밀성박씨밀산군직계세보」 등은 모든 내용이「한글전용」의 원칙 밑에 이루어져 이름 및 호 등 불가피한 것들만 괄호 안에 한자를 넣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말의 거유 목은 이색의 후예인 한산이씨족보를 보면 시조목은에 대해 『이 할아버지의 이름은 「색」(고)이라 하고 호는「목은」(목은)이라고 하시었다…』는 식이다.『고흥유씨 검상공파세보』도 이와 같은 형식인데 한글학회총무이사로 있는 유제한씨(72)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유씨는 이렇게 한글전용의 족보를 내게 된데 대해 『족보는 후손들이 읽고 조상에 부끄럽지 않게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한자로 엮어놓으면 읽는 이 없는 족보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히면서 이 한글족보가 나온 이후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까지 조상들의 훌륭한 행적을 읽고 기뻐하고 있다고. 또 이 족보는 아직 파보에 불과하므로 대동보도 이렇게 하자는 여론이 높다고 전한다.
유씨는 이름만은 한자를 괄호 안에 넣었으나 『이것도 언젠가는 없는 족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산이씨족보」의 한글화에는 한글전용론자 이현복교수(서울대·언어학) 의 주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족보의 현대화에는『후손 중에 적어도 국어학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나올 수 있지만 시대적 추세인만큼 다른 종친회에서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눈치다.
그래서 이들 한글족보를 보러 오는 다른 성씨들이 많이 있다고 하며 대전의 족보전문출판사(농경출판사·회상사·보전출판사)에도 한글족보의 출판의뢰가 최근 들어 밀려들고 있다. 이같은 족보의 현대화 경향에 대해 족보전문가 문형원씨(한국계보연구회)는 성균관·유림측에서도 한글족보에 별다른 반감을 느끼고 있지 않으며 『시대도 바뀌어 자라나는 젊은세대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족보를 펴내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권한다. <방인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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