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동네 수퍼에 앉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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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가득하던 감자밭 사이로 흙이 듬성듬성 드러났다. 이파리가 말라가고 줄기는 맥이 빠져버렸다. 제가 품은 애들의 발길질에 만삭의 이랑은 여기저기가 툭툭 갈라졌다. 하지가 지났으니, 감자 캘 때도 지났다. 더 놔둬봐야 잔뿌리가 나오고, 비라도 내리면 거둘 때 엉망진창이 된다. 저 아래 동네서 오락가락하는 장마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줄기를 들어내니 잔챙이 몇 개만 달려 나온다. 이번 감자농사 망했구나 싶었는데, 이랑 옆구리를 살살 헤집으니 굵직한 놈들이 호미에 걸려나온다. 주먹만한 놈부터 오징어땅콩만한 애까지 들쭉날쭉하다. 다섯 이랑을 심어 딴에는 수확이 꽤 많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게 뭐냐. 밭둑에 쌓아놓은 라면박스 네 개가 머쓱하다. 요즘 감자 품종은 대개 수미다. 내가 거둔 감자도 그렇다. 포실포실 분이 나는 두백은 만나기 힘든데, 같은 땅에서 수확량이 적어서 그렇겠지.

겉에 묻은 흙이 마르라고 고랑에 감자를 흩어놓고는 용석 군과 동네 수퍼로 줄레줄레 내려갔다. 뚝 분지른 오이를 안주로 놓고 막걸리 병을 따는데 나보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아자씨가 옆의 빈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묻는다.

- 자리에 임자가 따로 있나유, 앉으셔유.
- 아이구 감사합니다.
- 우리두 손님이구 아자씨두 손님인디 감사할 기 뭐 있것어유
아이스께끼를 빨던 아자씨가 킬킬 웃었다.

- 왜 그류, 지 낯짝에 뭐가 묻은규? 손에 흙 묻히구 사는 눔이라구 우습게 보는규?
- 하하하, 여기서 농사지으시는가 봐요. 저는 저 위에 집안 모임이 있어 왔는데 고기를 삶다가 양념이 모자라서 사러왔어요.
- 지는 날이 하도 좋아서 일이구 뭐고 때려치우구 퍼질러 앉었구먼유.
- 으히히, 아저씨 엄청 재미있으시네요. 관상 좋으신 걸 보아하니 물려받은 재산이 꽤 많으신 모양이에요. 회사도 안 다니시고 나와서 노시잖아요.
- 으메 아자씨, 말은 고마운디 어디 가서 돗자리는 깔지 말어유. 돌팔이 소리 듣기 딱 좋겠구먼유. 나가 무주택자에다 손바닥만한 땅뎅이두 없는 대책 없는 인종인디 관상은 무신 얼어 죽을 관상이래유. 이거나 자셔볼튜?

반으로 자른 오이를 내미니 아자씨가 신났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렇잖아도 목이 말랐는데...
탁배기두 한 잔 하셔유.
아녜요. 운전대를 잡아야 해요.
지두 운전할 줄 알어유, 한 잔 묵고 핸들 잡으믄 뵈는 기 읎구 기분좋잖유? 조 앞에 파출소 순사들도 한 잔씩 묵고 순찰다니던디.
아자씨는 풋향기 나는 대가리를 먹고 나는 쓰디쓴 아랫도리를 씹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제가요, 회사를 다니다 2년 전에 정년퇴직... 연금이 백만 원 넘게 나오고... 애들도 출가시켰고... 화성에 땅 천오백 평... 2년째 서울서 오가며 농사짓고... 팔백 평에는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골프연습장도 만들고... 바비큐 장도 있고...
식구들이 기다린다고, 시간이 없다던 아자씨는 그러고도 한참을 떠들더니 그랜저를 몰고 사라졌다.

아 글쎄 누가 물어봤냐고.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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