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 발명품 GDP, 삶의 질 반영 못해 위상 실추

중앙선데이

입력 2014.06.29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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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호 16면

GDP가 처음부터 나라 경제를 재는 ‘절대 지표’는 아니었다. GDP는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힌다. 1940년대 들어서야 GDP가 본격 활용된 거다.

흔들리는 경제지표의 왕

나라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1800년대 시작됐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태동으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다. 주요 선진국에서 이 논의가 구체화된 건 1930년, 대공황이 계기가 됐다. 경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살피고 경기 부양책을 쓰기 위해선 우선 정확한 통계가 필요했다.

이런 필요에 의해 1937년 미국에서 GDP의 원조격 통계가 처음 나왔다. 사이먼 쿠즈네츠(노벨경제학상 수상자)는 당시 처음으로 개인과 기업, 정부의 생산활동을 더해 나라의 경제 규모를 잰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미 상무부는 훗날 이때 나온 GDP 개념을 ‘20세기 최고의 업적’이라고 돌아봤다. “GDP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국내 생산 규모를 토대로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가능했고, 그 덕에 제2차 세계대전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GDP가 바로 경제 지표의 왕좌에 앉은 건 아니다. 198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지표는 국민총생산(GNP·Gross National Product)이다. GDP는 영토 개념이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를 다 합친 수치다. GNP는 사람을 본다. 국내든 해외든 ‘자국 국민’이 생산한 부가가치를 합친다.

1990년대 들어 GDP가 GNP를 대체하기 시작한 건 다국적 기업 때문이다. 국제 자본 이동과 기술 이전이 활발해지다 보니 “우리 국민이 얼마나 벌었나”를 보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얼마나 물건을 만들었나”를 보는 게 일자리 등 경제 상황을 짐작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1991년, 한국은 1994년에 핵심 경제지표를 GNP에서 GDP로 대체했다.

국민총행복 측정하는 GNH
핵심 지표로 자리 잡은 후에도 GDP에 대한 딴죽은 계속된다.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이 이른바 ‘삶의 질’ 논란이다. 풀어 말하자면 “행복은 GDP 순이 아니잖아요”다. 미 경제학자 모세 아브라모비츠는 1959년 “생산이 늘어난다고 삶의 질이 높아질지는 강한 의문”이라고 주장해 처음으로 이 논쟁에 불을 지폈다. 1972년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부탄 국왕은 ‘GNH(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란 개념을 들고 나와 “GDP가 절대 목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논란은 최근까지 지속된다.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조셉 스티글리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등 석학들을 초빙해 결성한 ‘스티글리츠 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위원회는 “GDP가 올라도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의 통계와 회계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며 삶의 질을 측정하는 새 지표 개발을 내세웠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역시 2010년 “경제 지표 외에 행복 GDP 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논란의 배경엔 “GDP가 생산 과정에서 불거지는 부작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깔려 있다. 경제가 성장하다 보면 환경 파괴나 교통 체증, 범죄율 증가와 경제 불평등 등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데 GDP는 이런 비용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려면 경제 규모보다 사회·문화적 특성에 주목해야 하는데 GDP에 천착하면 이런 요인을 놓치기 십상”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선 “성매매·마약거래도 반영”
주관적 잣대는 제쳐두더라도 GDP가 경제활동을 재는 잣대로서 완벽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한계로 가사노동과 지하경제가 꼽힌다. 가사노동의 경우 ▶시장 판매를 위한 생산이 아니어서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고 ▶생산에 포함할 경우 모든 성인 인구가 취업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하경제의 경우 정확한 규모를 파악조차 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GDP 통계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일각에선 “서비스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주요 생산활동인 가사노동을 배제해선 안 된다” “이탈리아처럼 지하경제 비중이 큰 나라에선 GDP만으로는 경제 실상을 반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등의 반론이 나왔다. 2010년엔 이인실 당시 통계청장조차 “가사노동을 배제한 GDP는 경제 실상을 왜곡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여성의 사회활동이 증가하면서 가사 도우미 활동이 늘었고, 이들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GDP로 잡히는 모순이 불거졌다. 똑같은 가사노동인데 도우미가 하면 GDP에 포함되고 주부가 하면 빠진다는 얘기다.

갈수록 늘고 있는 중고 거래나 자원봉사 활동 등도 GDP엔 잡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난해 생산된 자동차가 올해 중고로 팔린다 해도 올해 나온 최종 생산재가 아니기 때문에 GDP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돈을 받지 않는 자원봉사 활동도 시장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이유로 GDP에서 빠진다. 그런데 지난해 중고차 거래 건수가 신차 등록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중고 물품 거래가 활성화되고 있다. “중고 거래나 공유 경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해 이를 간과하고선 경제활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각국은 GDP를 수정·보완하려 바쁘게 움직인다. 지난해 미국은 처음으로 연구개발(R&D) 투자와 지적재산권을 GDP에 포함시켰다. 1999년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GDP에 편입시킨 이후 최대 변화로 간주된다. 한국 역시 국제 기준에 맞춰 올 5월 R&D를 GDP에 포함시켰다. 유럽 쪽에선 지하경제 반영 움직임도 활발하다. 영국은 최근 성매매와 마약 거래를 GDP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도 영국보다 한 달 앞서 “약물·성매매·밀수를 GDP에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경제활동의 일부로 보겠다는 뜻이다.

올 4월 미 상무부는 처음으로 GO(Gross Output·총산출)를 분기별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GDP는 최종생산재만 계산하다 보니 중간재가 오가는 기업 간 거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소비의 비중이 너무 높아 경제 정책에 혼선을 준다는 판단에서다. 중간재 생산까지 모두 합산하는 GO는 생산활동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배진영 인제대 국제경상학과 교수는 “GO를 살펴보면 기업가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비보다 저축과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며 “한국도 미국처럼 GO 통계를 좀 더 자주 내고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영택 한국은행 통계국장은 “GDP처럼 자주 발표되지 않지만 우리도 연간 산업연관표를 작성할 때 GO 수치가 나온다”며 “다만 미국처럼 분기별 GO를 발표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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