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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국」타개는 이렇게…특별진단|자금사정|긴축의 효과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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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긴축의 영향이 경제 각 부문에 스며들고 있다. 이에 따라 투기 「무드」는 다소 진정되었으나 자금난과 경기침체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현재 긴축의 강도가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실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신병현 한은총재와 한기춘 의원(경박·유정회)과의 대담으로 들어본다. 신 총재는 직책상으로나 평소 소신에서 통화가치의 안정에 특히 비중을 두고 있으며 한 의원은 평소 안보적·정치적 차원에서 중단 없는 성장을 꾸준히 주장해 왔다.【편집자주】
한=경제난세라고나 할까요 참으로 어려운 때라고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긴축얘기부터 풀어나가야겠군요. 요즘 긴축의 강도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뿔 고치려다 소 죽인다는 비명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원천적으로 긴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기업들이 이미 일을 벌여 놓은 데다 물가가 올라 당장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현실도 눈감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곰탕 값만 하더라도 작년에 5백원 하던 것이 요즘은 7백∼8백원이나 합니다.
특히 갑자기 돈줄이 죄어드니까 여기저기 사업을 벌여놓은 기업들의 자금난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식 긴축은 실정에 안 맞아>
물론 일본도 전후의 혼란 속에서 강력한 긴축을 펴 상당한 기업 도산을 대가로 물가 안정에 성공했지만 당시 일본의 여건과 지금의 우리 형편과는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신=일본식의 긴축정책을 우리 경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은 동감이에요.
몸이 건강해야 고단위 주사도 맞을 수 있듯이 우리 나라 기업체질로서는 일본식의 무더기 도산을 버텨내기는 어려운 실정이죠.
그러나 그 동안의 성장「무드」에 편승해 능력이상으로 사업을 벌여온 부실기업들은 차제에 정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기업의 투자도 중요하지만 「인플레」 피해가 가장 심한 서민대중의 소리 없는 고통에 더 시급히 대처할 때라는 생각입니다.
한=하지만 부실기업을 가려내는 기춘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과 수출확대를 위해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권장해 놓고 나서 이제 와서 안정을 이유로 갑자기 돈줄을 틀어막으면 그 책임은 오히려 정책당국 쪽에 더 많지 않을까요.
신=물론 정부의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기업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기업 자신의 판단착오의 탓이 더 크다고 봅니다.
『벌여놓으면 도와주겠지』하는 식의 기업풍토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또 실제로 은행돈만 얻어내면 「인플레」덕분에 앉아서 많은 돈을 벌지 않았습니까. 긴축 정책 만해도 갑작스러운 정책전환이 아닙니다.
한은 총재로 취임한 이래 기회 있을 때마다 긴축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고 실제로 지난 하반기부터 단계적으로 긴축의 고삐를 당겨왔어요.
결국 「설마」라는 식으로 사업을 벌여 왔다면 자기판단의 과실은 기업스스로가 책임지고 수습해야 되지 않을까요.
한=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은 것 같아요.
책임소재는 여하간에 이미 벌여 논 사업으로 기업의 자금수요는 전년의 2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정부는 연 40%씩 증가시켜 오던 돈 공급을 단숨에 25%선으로 묶어버리겠다니 기업의 능력으로는 수습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물론 절대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또 현재의 긴축 기조 속에서도 그때그때 형편을 봐서 자금공급에 신축성을 기하고 있어요.
요즘 기업들이 한숨 들리게 된 것도 이렇게 알게 모르게 돈줄을 풀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죽도록 내버려둘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1·4분기 중에도 당초 계획했던 5천5백억 원이 6천3백억 원으로 늘렸고 2·4분기에도 1천억 원 이상을 추가 공급키로 하지 않았습니까.

<성장포기 아니라 속도 줄이는 것>
이나마도 기업은 죽겠다고 난리지만 따지고 보면 본격적인 긴축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우선 당장 우리 나라 경제의 젖줄인 수출산업의 경우 상당수가 최근의 긴축여파로 투자의욕을 잃고 있어요. 중공 등의 추격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할 때인데 오히려 움츠러들고 있읍니다.
우리는 수출이나 중화학공업화를 단지 경제적 차원으로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원이나 지정학적위치를 볼 때 살길은 무역입국밖에 없다고 봅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출목표를 달성하는데 바로 우리의 보람이 있고 또 국민「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 TV등 전자제품 값이 10년 전과 비슷한 것도 수출 때문이 아닙니까, 이른바 보혈수출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동하는 「에너지」가 긴축 때문에 위축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가 구로 공단이나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돌아보고 느낀 것인데 확실히 그런 우려할 만한「무드」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대한 문제입니다. 기업들을 위축시키고 불경기를 가속시키는 긴축이라면 누가 못 하겠읍니까.
신=수출과 중화학공업화가 급하다는 것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능력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기업을 다 살리면서 안정을 기할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경제에 더 심각한 위험이 예상되기 때문에 미리 좀 정비를 하자는 것이지 수출이나 중화학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속도 조절이라 할 수 있겠지요.
성장속도를 늦추었다고 하지만 금년 약 9%의 실질 성장이 예상됩니다. 고도 성장에 습관되어 온 우리로선 9%가 미흡할지 모르지만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닙니다. 그 동안 좀 성급한 성장을 하느라고 물가가 올라 고통받는 사람이 많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계속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그 동안 우리 경제는 약간 들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발이 공중에 떠있었다고 표현할까요. 작년 만해도 환물 투기 「무드」가 팽배하여 위험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동안 긴축을 한 결과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경기가 어려워진 것은 틀림없으나 그 대신 들뜬 분위기는 확실히 가라앉았습니다. 지금 당장 괴롭고 불편하다해서 그것을 못 참고 돈올 풀면 정말 큰일납니다. 겨우 잡아놓은 투기 「무드」가 다시 폭발할 위험이 있어요.
또 기업의 자금사정이 그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적응의 여지는 많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기업이 자금난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중앙은행의 입장 아닙니까. 기업 쪽에서 본다면 영화로 말해 악역 구두쇠를 중앙은행이 맡아야지요.
한=기업을 가르치기 위해서 불황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긴축을 계속하면 중소기업 등 한계기업이 더 어렵고 실업 등 사회적 문제가 커지는데 안보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부실기업을 거르는 것은 좋지만 우리의 특수여건을 좀 감안해야 되겠지요.
신=그러니까 긴축을 좀 살살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사실 긴축은 하면서도 기업의 정 어려운 사정은 다 돌봐주고 있어요. 부드러운 긴축이지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본격적인 긴축은 한번도 없었다고 할 수 있어요.
옛날보다 조금 아프다는 정도로선 미흡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은행인은 공장 가 보지 말아야>
한=기업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으스스하겠습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긴축을 더 할 여지도 있고 또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수출공단 같은데 가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엄살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책상 위에서 생각하는 것과 직접 현장에 가서 보는 것과는 「감」에 잇어서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행인은 공장에 가보지 말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공장에 가서 돈 때문에 기계가 못 돌아가는 걸 보면 돈을 낼 마음이 생기고 결국 그것이 통화를 증발시켜 「인플레」를 일으킨다는 논리지요.
공장을 계속 돌리고 수출을 늘리는 것도 물가안정이란 튼튼한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이야기를 금리 쪽으로 돌려보죠. 롱화 당국의 입장은 조만간 금리를 올리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기업 쪽의 반발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요.
신=교과서대로 한다면 현재의「인플레」하에서는 당연히 금리를 올려야죠. 돈의 값이 금리인데 물가가 이렇게 오르는 형편에 금리라고 안 오를 수 있읍니까.
더구나 현재의 「인플레」 하에서는 은행돈을 쓰고 있는 기업들이 「인플레」덕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금리를 더 낮춘다면 예금자의 희생을 댓가로 기업 편만 드는 결과가 되니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봐요.
물론 금리를 올리는 일도 간단치는 않아요. 금리를 올릴 경우 한달 후만 돼도 바로 기업의 원가부담을 가져올 텐데 특히 요즈음같이 자금조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금리의 추가부담까지 줄 수 있느냐는 문제에는 수긍이 갑니다. 아뭏든 금리문제는 신중히 검토하고 있읍니다.
한=자금의 양도 문제지만 시중에 풀려있는 돈을 어떻게 돌고 있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 않겠어요.
은행에서 풀려 나온 돈이 다시 돌아 풀지 않고 「인플레」만 자극하고 있어요. 보험·단자회사 등을 통한 적극적인 유동성 흡수장치가 있어야겠어요.
주거래 은행제도 율산의 경우 대기업에 은행이 끌려 다니는 장치로 악용되지 않았읍니까.
신=금융업무의 낙후성을 통감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민영화나 자율화를 무리하게 서둘러서는 곤란해요. 단계적으로 무리 없이 해야지요. 가령 월별로 묶어놨던 은행별 여신한도도 점차적으로 철폐할 방침입니다.
우리의 저력으로 보아 이 정도의 어려움은 충분히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다고 빋습니다.
한=통화안정의 수문장이 이토록 단단한 소신과 자신이 있으니 마음 든든합니다.

<정리-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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