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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대처 총리가 카라얀을 질투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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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0세기 가장 화려했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위)과 인도 출신의 세계적 마에스트로 주빈 메타(1936~·아래). 둘은 독창적인 곡해석과 정열적인 지휘로 많은 팬을 거느렸다. [중앙포토]

거장(巨匠) 신화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펜타그램
824쪽, 2만8000원

“연주하는 동안 지휘자는 신적 권위를 가진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가히 살아있는 법(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가 했던 말이다. 화려한 무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마에스트로(거장)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요약한다. 『거장 신화』의 저자에 따르면, 거장 중의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혹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록스타 그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대중적 영웅과 또 달리 엘리트를 위한 우상이라서 권력자-부자를 주로 추종자로 뒀다. 일테면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가진 무한권력을 질투했고, 일본의 소니 회장 오가 노리오는 그의 임종을 지킨 일화로 유명하다.

 지금부터 반전인데, 『거장 신화』에 따르면 지휘자란 실은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가문이랄 것도 없는 게 작곡자가 자기 곡을 지휘하는 게 보통이던 19세기 중반까지는 지휘자라는 직종 자체가 없었다. 작곡자가 해야 할 직능의 하나가 지휘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지휘자란 작곡가를 돕던 하인 신분이거나, 요즘 말로 파트타임 비정규직에 머물렀다.

 근대적 지휘자 제1호로 꼽히는 한스 폰 뷜로 역시 처음에 그랬다. 1865년 그가 컨디션이 안 좋은 바그너를 대신해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初演)을 악보 전체를 외워 지휘하던 순간 놀라운 마법이 일어났다. 바그너는 “작곡자 의도의 모든 뉘앙스를 흡수했다”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는데, 그때 지휘자는 작곡가의 대리인에서 음악의 주인공으로 성큼 올라섰다. 음악사 이래 가장 극적인 권력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그건 청중에게도 좋았다. 청력을 잃은데다가 무대 울렁증으로 버벅대기 일쑤이던 베토벤이 재앙 수준의 합창 교향곡 지휘를 맡는 대신 대타(代打)지휘자를 쓰면 오케스트라 소리가 더 좋아진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챈 것이다. 흥미롭다. 그렇다고 이런 말만 담는데 그쳤더라면 『거장 신화』는 범용한 읽을거리로 그쳤으리라.

 이 책은 클래식의 죽음과 그 이유를 다룬 핫한 책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클래식은 요즘 ‘하찮은 존재’로 전락했다. 썰물처럼 뻐져나간 청중, 거장들의 시대와 달리 성장을 멈춘 난쟁이급의 지휘자, 시(市) 재정을 갉아 먹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오케스트라 운영의 위기 등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문제는 그게 다 절대권력 지휘자 탓이라는 게 이 책 내용이다.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저들의 권력욕, 우상을 원하는 대중심리가 극소수의 스타 지휘자를 만들었지만, 1970~80년대 지휘권력의 정점을 찍은 뒤 바로 위기를 낳았다. 지금 거물 지휘자의 황혼, 클래식의 죽음은 서구 음악을 조종하는 숨은 권력인 대형 에이전트의 횡포와 서로 맞물려있는 구조다. 이들은 스타 지휘자를 독식하고, 그래서 지휘자 양극화 현상을 낳았다. 급기야 새 지휘자의 등장이 봉쇄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클래식 음반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3% 내외. 토스카니니 활동 당시 클래식 음반의 지분은 25%였음을 떠올려 보시라. 클래식은 늙은 음악, 흘러간 노래란 판단인데, 그건 한국에서 국악, 성인가요가 홀대받는 현상과 닮은꼴이다.

 그래도 눈에 뜨이는 지휘자 그룹은 195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지휘자로 5~6명 있다는 저자의 귀띔이니 참조하시라. 한국의 정명훈이 있고, 에사 페카 살로넨·리카르토 샤이·사이먼 래틀·발레리 케르기예프 등이 그들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한국·중국에서 클래식 부활을 점치고 있어 흥미롭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클래식 희망의 불씨는 피아노를 배우는 6000만 명의 젊은 인구에 50개 오케스트라가 움직이는 중국에 있고, 클래식 음반 판매 비율이 19%나 되는 한국에 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런 덕담이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 우리가 19세기 이전 유럽 음악의 의발(衣鉢)을 이어 받아야 하지? 그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또 클래식의 죽음은 사실이지만 지휘자에 의한 타살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다. 저자의 주장과 달리 19세기 낡은 음악의 퇴진, 그래서 자연사로 보는 게 맞다는 지적도 잊으면 안 된다.

 클래식이 보편음악이 아니고, 지구상 수많은 종족음악(ethnic music)의 하나일 뿐이라면(실은 이게 음악학의 상식이다), 우리가 우리의 음악을 해야하지 않을까. K팝이란 것도 잘만 키우면 그런 목표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실은 ‘한국에서 음악하기’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 질문인데, 모두 클래식의 죽음을 전하는, 썩 괜찮은 책 『거장 신화』가 주는 암시의 일부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조우석은
저널리스트 겸 문화평론가. 저서로 『굿바이 클래식』 『남자는 서재에서 딴짓한다』 『인생부자들』 등이 있다.

‘황금 귀’에 카리스마 … 거장의 조건

한스 폰 뷜로가 지휘자 제1호라면, 현대 지휘자의 원형을 제공한 건 그 직후 등장한 아르투르 니키슈였다. 그의 연주를 듣는 당대의 거의 모든 이들은 지휘라는 게 악보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새로운 음악 창조행위라는 걸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작곡가 차이콥스키도 홀린 듯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휘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마법을 거는 것 같았다.” 자신의 교향곡 5번 초연을 직접 지휘했다가 크게 망쳤던 직후였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뻔한 실패작을 지휘전문가 니키슈가 기막히게 살려낸 것이다. 그 유명한 지휘자 에드리안 볼트도 니키슈의 마법을 무대에서 듣고는 “저녁마다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왜 어떤 지휘자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할까. 영국의 소설가 겸 음악평론가, 무엇보다 음악광인 『거장 신화』의 저자는 10년에 걸쳐 지휘자, 프로듀서 등을 인터뷰하며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유명한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골웨이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해 지휘에 도전했다가 바로 꼬리를 내린 적이 있다. 그런 이가 한 둘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거장의 자질에 ‘황금 귀’는 물론 카리스마와 지성이 기본이다. 단 스타일은 다 다르다. 푸르트벵글러는 그냥 팔을 흐느적거렸다. 정반대로 토스카니니는 메트로놈 같이 단조롭게 휘젓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흘러나오는 음악은 너무도 달랐다. “거장들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공유한다”는 게 저자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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