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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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봄의 화신과함께 1979년의 새미술「시즌」이 서서히 개막되었다. 지난해에 한국미술의 새변경을 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창설된 중앙미술 대전도 그 두번째 제전의 개최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한국의 젊은 화가들에게 있어 유일한 등용문이 되어온 국전은 자칫 한국미술의 동맥을 경화증세로 몰아가기 쉬웠다. 지난해에 각종 민전들이 생긴 것은 그와같은 병폐에대한 일종의 대증요법의 필요성을 통감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의 층을 두텁게 하고, 유망한 신인들을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화단에 부어 넣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민전의 성격이나 취지, 또는 그 운영방식보다도 한국의 현대미술 그자체에 더 많은 문제가 있기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에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및 동양화들의 첫 서구순회전이 있었다. 이에 대한 서구측의 반응은 반드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일 큰 비평은 전시된 작품들이 한국적이지 못하다는데 있었다.
바꿔 말해서 충분히 독창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세대전의 한국의 예술가들이 의식했던 것은「서양」이었다. 오늘의 예술가는「세계」를 의식한다. 그것은「우물안의 개구리」적인 사고를 벗어나 창조와 발표의 무대를 한국으로부터 세계로 발전시킨다는 의미에서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참다운 세계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결코 국적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한국의 화가들이 저버리지나 않았나 염려된다.
예술가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풍토적인것, 예술가를 키워내고 또 그를 꿰뚫고 있는 민족적인 것은 그의 예술이 창조적이면 창조적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작품속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화란인의 마음을, 「칸딘스키」와「샤갈」에서「슬라브」의 풍토를, 「들로네」에서「프랑스」의「에스프리」를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때문이다.
물론 화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간에 그는 자기의 국적성을 벗어날수 없음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자기의 국적성을 자각적·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국의 오늘의 그림에서 서구인들이 여간해서 한국적인 뭔가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우리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또한 오늘을 사는 한국의 화가들이 예술가에게 있어「오늘」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그림을 그리느냐하는데 대한 자각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얘기와도 같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독특한 발상과 세계에 공통하는 현대미학을 바탕으로하며 독창성과 가능성에 넘치는 진정한 한국의 새 미술….』
제2회 중앙미술대전의 작품모집 요강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명한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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