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간, 정치에 이성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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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정치부문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지난 10일부터 문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24일까지의 15일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인사청문회의 법적 절차, 후보자의 소명권과 청문 의무는 무시된 채 단기적 여론에만 좌우되는 한국 정치의 단면이 드러났다.

 발단은 공영방송 KBS였다. KBS는 후보 지명 이튿날인 11일 “문 후보자가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굽이굽이마다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기회가 됐다”는 발언 등 전체 맥락은 무시한 ‘거두절미 저널리즘’의 진수였다. 곧장 “이 정도면 대국민 선전포고”(진중권 동양대 교수) 등 SNS가 들끓었고 논란은 정치권으로 전염됐다.

 야당은 ‘친일 프레임’을 씌웠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일본 총리를 뽑는 것도 아닌데 이분에게 이렇게 에너지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고 청문특위위원장에 내정된 같은 당 박지원 의원은 “낙마를 위해 총력 경주하겠다”고 했다. “신임 조윤선 정무수석의 첫 번째 과제는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 요청서가 국회로 넘어오지 않게 하는 일”이라는 박 원내대표의 주장에서 나타나듯 야당은 문 후보자의 진의를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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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당도 부화뇌동했다.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은 12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문 후보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관·민족관을 가졌다”며 사퇴를 주장했다. 일부 의원이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유력 당 대표 후보인 서청원 의원도 “환부를 도려내야 빨리 아물듯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사퇴 주장 대열에 합류했다. 이즈음부터 당 지도부는 문 후보자의 거취와 관련해선 입을 닫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청와대만 쳐다봤다.

 청와대는 주저했다. 박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 중이던 18일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박 대통령은 총리 임명동의안과 인사청문요구서는 귀국해서 재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21일 귀국해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가 자진사퇴 이후 민 대변인은 “박 대통령은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청와대가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냈으면 당연히 청문회가 열렸을 것 아닌가. “대통령 말씀은 사실관계를 호도한 것”이라는 새정치연합 김한길 대표의 지적에 반박하기가 어렵다.

 문 후보자는 결국 “지금 시점에서 사퇴하는 것이 박 대통령을 도와 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후보직을 내려놨다. 문 후보자의 회견 직후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청문회가 영어로 히어링(hearing)이다. 후보자의 의견을 국회의원과 국민이 듣고 판단해야 한다. 법과 절차를 지키지 않은 채 듣지 않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 한 점이 대단히 유감이고 착잡하다.”

 백번 천번 옳은 얘기다. 그러나 그동안 “인사청문회를 꼭 거치겠다”는 문 후보자의 목소리에 정치권은 묵묵부답이었다. 뒤늦게 여당에서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에 당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는 책임방기에 대한 비겁한 변명처럼 들린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절차를 준수하는 데 있다. 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 동의는 헌법에, 인사청문회는 법률에 명시된 의무이자 권리다. ‘악의적 보도→일부의 선동→야권 무차별 공세→여권 부화뇌동→후보자 자진사퇴’의 촌극이 벌어진 지난 15일간 우리 정치권에 합리와 이성은 없었다.

권호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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