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하고도 손해본산유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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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메이저」의 탐욕은 끝이 없어 가격을 폭락시키면서까지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60년대와 70년대사이의 석유가격은 오히려 50년대의 가격보다 밑도는 기현상을빛었다.
석유수입을 늘리려는 「메이저」의 노산정책때문에 생산량이 늘면서 60년대의 공급능력은 세계총수요량의 25%를 초과했다.
또 소련산 『붉은 원유』가 「유럽」시장에 쏙아져나오면서 「메이저」들은51년에 「배럴」 당 1「달러」 65「센트」이던 중동산 원유공시가격을 1「달러」 40「센트」대로 깎아 석유소비 조장정책을 취했다. 산유국은 석유를 증산하고도 오히려 손해보는 꼴이었다.
73년 세계석유파동때도 「메이저」들은 수익이 줄었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산유국의 석유가인상으로 전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72년에 비해「엑슨」은 순이익을 59% (24억4천만 「달러」), 「텍샤코」는 45%, 「모빌」은 47%, 「걸프」는 60%, 「소칼」은 40%, 「셀」은 28%의 신장율을 보였다.
「메이저」의 이러한 독점이익을 조금이라도 해칠 움직임이 있을 경우이들의 보복은 철저했다.
53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린 「쿠테다」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모하마드·모사데크」박사는 51년4월 정권을잡자 BP의 자회사였던 「앵글로·이란」석유회사와 「아바단」 유전을 국유화해버렸다.
이렇게되자 BP는 「메이저」의 다른 6대회사의 지지를 얻어 「이란」산원유의 판노를 봉쇄해버렸다. 이때문에 사태발생전 2년동안 3억7천8백만 「배럴」에 달했던 「이란」석유수출량은 2년동안 0·24%인 92만4천 「배럴」로 격감되었고 50년 1천6백만「파운드」에 달했던 석유수입은 53년 0·62%인 10만 「파운드」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모사데크」의 목을 졸라 놓고 「메이저」는 영국정부와 미국CIA의 힘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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