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코피노 판결,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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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른바 코피노(Kopino)의 ‘아빠 찾기’에 대해 처음으로 법원 판결이 나왔다. 그간 먼일처럼 여겨져 왔던 코피노 문제가 눈앞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서울가정법원 가사2단독 권양희 판사는 필리핀에 사는 A군 형제가 한국 남성 B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A군 형제는 B씨의 친생자임을 인지한다”고 판결했다. 유부남인 사업가 B씨는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면서 현지 여성 C씨와 동거해 형제를 낳았으나 한국으로 귀국한 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이번 판결로 A군 형제는 B씨에게 양육비 지급 등을 청구할 수 있다. 다른 코피노들의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A군 형제와 같은 코피노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학이나 관광·사업 등을 위해 필리핀에 체류했던 한국 남성들이 현지 여성과 만나 아이를 낳고도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번 판결도 C씨가 B씨의 인적사항을 어렵게 알아낸 뒤 그를 법정에 세우고 법원에 유전자 검사를 신청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많은 코피노들이 한국인 아버지의 외면 속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은 해당 남성들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판결은 일부 한국 남성들의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행태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코피노 관련 기사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이나 미국에 성적 착취를 당한 피해자라고 해왔는데 한국이 경제선진국이 된 뒤로는 가해자로 변모했다”는 지적을 전하기도 했다. 실제 현지에서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고 하니 창피한 노릇 아닌가.

인식의 변화와 책임의식의 제고, 그리고 사회적 관심이 없다면 국제적 수치를 면하기 힘들다. 일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피노’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일본의 경우 국적이나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는 문턱을 낮춰주거나 현지 일본 기업에 우선 채용하고 있다. 코피노들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지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