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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같은 붉은 악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0호 31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팀이 아쉽게도 러시아와의 월드컵 H조 예선 첫 경기에서 비겼다.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대패할 때만 해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전을 보고 난 후 홍명보 감독의 전략을 깨닫게 됐다. 러시아를 방심하게 만든 뒤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전법이었다.

터키 출신인 내가 H조에서 가장 두려워한 팀은 러시아였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에서는 요즘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다고 들었다. 차기 월드컵 대회 개최지인 러시아가 기대와 달리 한국에 승리하지 못해 민족주의 기운이 다소 약화된 건 아닐까 하고 상상해본다.

다시 월드컵 시즌을 맞아 한국의 ‘붉은 악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2002년 월드컵에서 터키는 중국·일본·한국을 차례로 꺾고 3위를 차지했다. 한국에 유학 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과의 3·4위전에서 태극기보다 더 큰 터키 국기가 경기장에 나부끼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같이 경기를 보던 주변 사람들이 “한국은 터키의 형제 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나중에 한국에서 유학했던 터키 학생들에게 물어봤더니 그 국기는 한·터키 친선협회와 이스탄불 문화원이 합작해 만든 것이었다. 그 큰 터키 국기를 경기장에서 휘날리게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붉은 악마’들이었다.

붉은 악마라. 악마들이 어떻게 이렇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한국에서 이 ‘붉은 악마’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터키 친구들과 아침 일찍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갔다. 스위스와 맞선 한국 대표팀을 스크린으로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리가 없어서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붉은 악마’ 몇 명이 우리 사정을 듣고 자리를 양보해줬다. 덕분에 우리는 신나게 응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의 바른 악마가 있을 수 있나.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월드컵 때는 중국 베이징에 있었다. 중계방송을 하는 커피숍에서 ‘붉은 악마’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어떤 악마는 프랑스 친구와 함께 프랑스를 응원하러 왔고 또 다른 악마들은 스페인 친구와 스페인팀을 응원했다.

붉은 악마들의 이러한 모습 역시 홍명보 감독의 축구 전략과 똑같아 보였다. 말로만 악마였지, 실제로는 천사와 같았다.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멋지고, 예의 바르고. 악마와는 완전 딴판인 사람들이었다. 진짜 악마들이 이들을 봤다면 “나쁜 악마들, 너희들 때문에 우리 이미지가 다 망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 ‘붉은 악마’들이 외국에서 한국 공공외교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나도 월드컵 때마다 천사 같은 악마들에게서 당한 게 한 가지 있다. 한국팀을 응원하러 갈 때 ‘붉은 악마’들이 “이번에 터키가 월드컵 본선에 올라 왔나요”라고 묻곤 했다. 2002년 월드컵 3위 팀 터키는 이후 한 번도 유럽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풀이 죽은 나를 보고 ‘붉은 악마’들은 “안타깝네, 3위까지 올라간 팀이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마치 좋은 대학에 합격한 자녀를 둔 부모가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말같이 들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터키는 4강에 올라갈 만할 때만 월드컵 본선에 갑니다”라고 둘러댄다. 또는 “우리가 월드컵에 참가할 유럽 국가들을 훈련시켰어요” “이번에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는 나라들과 다른 곳에서 따로 월드컵을 하려고요. 어차피 32개 나라를 모으면 되잖아요”라고 하는 등 농담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한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23일 한국이 알제리전에서 완승하기를 손꼽아 기원한다. ‘붉은 악마’ 파이팅.



알파고 시나씨 2004년 한국에 유학 와 충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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