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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건축에도 부는 명품 컬렉션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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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그러진 육면체, 뻥 뚫린 형태, 새빨간 장식 등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모습의 건축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런 건물들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 건축가들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새삼스러운 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소위 이런 '볼 만한 건물'들이 지나치게 표현에 집착한 나머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어색한 도시경관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함께 늘어나고 있다.

근대 초기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했던 화신백화점을 허문 자리에 지은 종로타워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 라파엘 비뇰리가 설계했다. 이 건물은 종로의 분위기는커녕 600년 고도(古都)인 서울의 도심이라는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설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결과 북촌 가꾸기를 통해 한옥 살리기 노력이 한창인 가회동이나 안국동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공상과학영화에 나타날 듯한 우주선 형태의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재작년 완공된 강남의 교보타워는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했다. 이 빌딩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도 역시 '색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주변 도시경관과 색채.형태 등 여러 면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상당수의 국내 건축가는 "보타가 유럽에서 설계했던 벽돌을 사용한 작은 규모의 건물 형태를 크기만 뻥튀기한 분위기"라고 지적한다.

다니엘 리베스킨드가 설계해 영동대로변에 세운 거대한 원형과 막대가 전면에 배치된 빌딩도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대변하는 해체주의 문법으로 이해한다 해도 기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대한 장식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장난스럽다. 다만 리베스킨드가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리의 그라운드 제로 현상설계에서 당선된 세계적인 건축가인 만큼 그런 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뿐이다.

최근 이같이 세계적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의뢰해 서울이라는 도시 맥락을 무시한 건축물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봉렬(건축학과)교수는 "명품 컬렉션이 건축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의 취향이나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루이 뷔통이나 프라다 같은 명품을 가지고 싶어하는 심리와 비슷하다는 의미다. 마리오 보타는 지난해 가을 램 쿨하스, 장 누벨과 나란히 설계한 리움미술관 준공 기념식 기자회견에서 "건축가 세 사람이 한 대지에서 연접해 건축하는 것은 유럽이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일관성과 조화를 중시하는 유럽문화와 비교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발언이다.

외국 건축가라고 다 같은 태도는 아니다. 파리의 미테랑 국립도서관 설계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서울의 이화여대 캠퍼스 플랜을 맡은 뒤 설계팀을 이끌고 수시로 서울에 와 대학 담당자들과 워크숍을 한다"고 말했다. 해당 대학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주변 도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설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건축가를 초빙하는 일은 우리 건축환경과 설계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발주자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활용하는가에 따라 얻어지는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명품을 짓더라도 우리 도시경관과 문화에 어울리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선 화음이 중요하듯 도시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개별 건물의 미(美)와 함께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어 내는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혜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