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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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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옛날에 소년을 사랑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소년이 나무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열매가 필요해.”

 나무는 열매를 내주었습니다.

 성년이 된 소년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살 집이 필요해.”

 나무는 가지와 몸통을 내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년도 나이가 들었습니다.

 “힘들어, 이제 앉아서 쉬고 싶어.”

 나무는 하나 남은 등걸도 내주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줄거리다.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나무의 사랑은 인생의 로망이었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도 여겼다. 요즘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면 이 아름다운 동화를 고쳐볼 심산을 갖게 한다.

 

 남편을 먼저 보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도시에서 살려면 돈이 필요해.”

 어머니는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성인이 된 아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살 집과 사업자금이 필요해.”

 어머니는 유일한 부동산을 내주었습니다.

 다음부터 아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린다고 호소했지만

 아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낌없이 주던 어머니는 아들을 상대로 부양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2012년 2월 서울가정법원은 “아들은 어머니에게 매월 6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판단 근거는 세 가지였다. 어머니는 수입·재산이 없어 곤궁하고, 아들은 안정된 직업·재산을 갖고 있으며, 아들의 기반이 상속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한때 서로를 사랑하던 모자는 법정다툼을 계기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최근 중앙일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도 자녀에게서 버림받는 상속빈곤층을 탐사 보도했다. 부양료 사건의 판결문 226건을 분석했는데 10건 중 3건이 아낌없이 주던 ‘나무’들이 제기한 경우였다. 전체 부양료 청구소송도 최근 10년 새 3배로 늘었다. 유교적 가치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부양비를 달라고 청구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식 뒷바라지를 하다 노후에 버림을 받는 모습은 주변에서 종종 보는 ‘리얼 코리아’의 한 단면이다.

 한국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가족 친밀도가 높은 나라가 아니다. 따로 사는 부모와 대면 접촉을 하는 빈도가 주요 26개국 중 꼴찌였다(2007년 종합사회조사). 미국 사회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올해 발표한 연구 내용은 가족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연구팀은 세계 25개국의 성인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노년 삶에 가장 큰 부양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보느냐’. 한국인의 응답 결과는 ‘자기 책임 53%, 정부 33%, 가족 10%’였다. ‘자기 책임’ 비율은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높았고 ‘가족 책임’은 꼴찌에 가까웠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 문제, 특히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좀 더 실질적이고 솔직해져야 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야 어느 문명이나 비슷하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자녀의 교육과 결혼에 집착한다. 자녀의 성공을 자기의 성취로 받아들여 퍼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퍼주기는 종종 자녀의 자율 의지와 공동체 의식을 위기에 빠뜨리고 가족 불화와 사회 갈등을 촉발한다. 등걸만 남은 부모는 감사를 표현할 준비가 덜 된 자식과 정반대 편에 서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수정돼야 한다. 돈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언젠가 도움이 끊기면 금이 가기 십상이다. 퍼주기는 스스로의 노후를 ‘털 뽑힌 수탉’으로 만든다. 자식의 손을 ‘상습 자선냄비’로 만들기도 한다. 자식에게는 물질적 지원 대신 정서적 충만함을 더 주자. 스스로의 노후 준비에 더 투자하자. 등걸 문화, 상속빈곤층 고려장은 어리석은 동화다. 대신 『지혜롭게 주는 나무』는 어떨까.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