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도심서 유적발국 한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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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런던」의 금융가 「시티」에서도 가장 번화가에서는 요즘 유적적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다른 나라라면 의례 거론됐을 『개발이냐, 역사보존이냐』라는 문제를 떠나 당연히『역사우선』이라는 것이「런던」시민들의 생각.
건설업자들도 도시 개발「플랜」을 늦추는등 그야말로 「역사존중의 나라」임을 과시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시티」라고 불리는「런던」 교에서부터 신문가 「플리트」가 까지의 약2k, 3백80 「에이커」의 영역은 역사의 보고다. 기원원년 전후의「로마」시내부터의 역사가 파묻혀있다. 이런 지역이 도시개발로 파괴돼서는 안된다고 해서 73년12월부터「런던」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이 손을 잡고 대대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건설업자들이 이들 고고학자들의 발굴계획을 거절할수있다는 법적 조항이 있지만 한번도 협조를 거절당한 적이 없다고 발굴책임자 「브라이언·홀베이」 씨는 말한다.
이렇게 해서 5년동안「시티」 가의 약30개소가 발굴됐다. 현재 발굴되고 있는곳은 중앙우체국앞,「맨션·하우스」앞, 옛날「런던」항이 있던 3개소. 이곳에 「빌딩」을 지으려던 건설업자들과의 개발지연 계약은 작년 10월까지였으나 다시 3개월을 연장, 발굴중이다.
5년간의 발굴작업으로 확실해진 이곳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원년부터 2세기까지「로마」지배하에 있었던「런던」 은 인구가 많았고 최초의 번영기를 맞았다. 이후 8세기까지는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고 농촌화하는 쇠퇴기였다.
제2 번영기는 10세기의 「색슨」 시대.
「맨션·하우스」앞의 발굴로 지금것 추정밖에 할수없었던 기원 50년 120년, 150년께의 대화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중앙우체국 앞에서는 3백구의 해골이 발견돼 발굴자들을 놀라게했다. 9세기께의 교회터가 함께 발견돼 공동묘지였음에 틀림없다. 학자들은 이 해골을 대상으로 당시 주민의 건강상태· 섭취음식·운동량까지 연구하고있다.
이런 대규모발굴이 수도의 한가운데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보존과 발견에 관심을 보여주는 「런던」 시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책임자 「브라이언」 씨는『불안정한 현대사회에서는 전통과 유산에 대한 귀속의식이 강해진다. 자기 자신의 뿌리가 어떤곳에 있는가를 찾아내 마음의 안정을 얻자는 것이 잠재적 요구다.
그러므로 고고학·역사학은 『불안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이다』라고 말하고있다.
어쨌든 고고학자들이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가며 자유롭게 발굴을 할수있다는 환경은 잦은도굴로 문화재보존이 어려운 우리나라로서는 부러운 일이다.【런던=장두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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