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바둑의 급신장 입증 조훈현 왕위 잇단 승전보의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 바둑의 정상 조훈현 왕위가 일본에 원정, 일본 최대「타이플」인「기성」(독매 신문주최)「타이를」보유자인「후지사와·히데유끼」9단을 당당히 불계로 물리쳤다는 소식은 이제 한국 바둑이 세계의 정상을 자처하는 일본 바둑의 수준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현대 바둑의 역사가 짧은데다가 조남철·김인 8단, 윤기현·조훈현 7단, 하찬석 6단 등 한국 바둑의 정상「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기사들이 모두 도일 수업을 거쳤기 때문에 일본기사들이 한국 바둑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76년 서봉수 당시 왕위가 도일, 조치훈 8단(당시 7단)「고바야시」8단(당시7단)과 특별 대국을 가졌을 때도『조는 몰라도「고바야시」만은 이겨주기를』바랐으나 2국을 모두 패배, 바둑계와 바둑「펜」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었다.
비록 이번 대국에서 조 왕위가 흑을 쥐고 3집을 공제해 주는 조건으로 (보통 4집반, 흑은 5집반 공제)두었다고는 하지만 한 수 접어준다는 이같은 조건을 비웃기라도 하듯「후지사와」기성을 시종 몰아붙인 끝에 계가를 할 필요도 없이 무릎을 꿇게 했다는 것은 이제 일본기사들이 중공 바둑만 무서워할게 아니라 한국 바둑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 왕위는 대국 전에 이미 자신을 얻은 듯 주관 측에서「집흑·3호 공제」의 조건을 내세웠을 때 미소를 띠며『별 상관있겠읍니까』고 선선하게 수락했다고 전한다.)
또「후지사와」기성과의 대국이 끝난 후「후지사와」기성을 비롯한 7, 8단의 고단 기사들이 마치 구원이라도 요청하듯 날카롭고 속기에 강한「고바야시」8단에게 조 왕위와의 즉석 대국을 권유, 대국이 이어졌는데 이 대국에서도 조 왕위는「고바야」8단을 시종 몰아붙여 2백5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어 관전 기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해주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상대방에게 칭찬을 않기로 유명한「고바야시」8단은 조 왕위에게 패하고 난 후『정말 세군. 굉장한데…』하고 감탄을 연발했음은 조 왕위의 높은 기력에 대한 일본기사들의 느낌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 왕위의 이번 승전보를 일본에서 조치훈 8단의 속전 연승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까닭은 조 왕위의 바둑이 일본 바둑의 영향으로부터 거의 벗어나 있음을 증명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의 도일 수업 끝에 귀국했을 때도 국내에서 조 왕위의 대국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그가 국내에서 처음「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귀국한지 3년만인 74년(최고위)이었으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2년 후 그의 가장 강력한「라이벌」인 서봉수 6단으로부터 우리나라 최고의「타이틀」인「왕위 타이틀」을 탈취하고 나서부터였다. 이렇게 볼 때 조 왕위 바둑의 바탕이 일본에서 다져진 것이기는 해도 그 완성은 귀국 후 국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국 후「후지사와」기성이『전체적으로 꽉 째어져 안정감이 있고 투지가 강해진 점이 옛날(도일 수업시)과 사뭇 다르다』고 조 왕위의 바둑을 격찬한데서도 쉽게 드러난다.
안정감이나 투지라면 일본에서도「후지사와」기성을 따라갈 만한 기사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금년도 기성「타이틀」7번기에서「후지사와」기성이 도전자「가또」본인 방에게 3대1로 막판에 몰렸을 때 일본 바둑계에서는『십중팔구「타이틀」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고 입을 모았으나「후지사와」기성은 예의 안전감과 투지의 조화로 남은 3판을 연방, 4대3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타이틀」을 방어한 것이다.
조 왕위와의 대국에서도 그같은「후지사와」기성의 기풍은 잘 나타났다는 것이 전문기사들의 견해다.
그러나 완성된 모습을 갖춘 조 왕위에게는 그러한 기풍도 맥을 추지 못했던 듯, 빈틈없는 조 왕위의 응수에 손을 들고만 것이다.
어쨌든 조 왕위의 이번 도일 대국은 우리 바둑계에 빛을 던져준 낭보였다. 내년에 일본에서 열리게 되는 세계 바둑 대회에서도 일본·중공 등 바둑 강국을 물리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위전」기보가 끝나는 대로 조 왕위의 대「후지사와」전, 대「고바야시」전의 기보를 김수영 5단의 해설로 연재합니다. <정규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