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이해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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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인 박상익>
술집 「납작집」으로 들어선 순경의 위세는 당당했다.
질서가 뒤숭숭했던 당시 순경의 직권은 대단했다.
순경이 들어서고 주위가 잠시 조용해지자 다른 주석에 앉았던 한 손님이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나를 겨냥한채 꽥 소리를 질렀다.
『저놈입니다. 저놈이 나쁜놈입니다. 저놈이 두사람의 싸움을 붙였습니다.』 그 손님은 내가 『귀찮으니 나가 싸워라』한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손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순경은 나에게로 성큼 다가서더니 다짜고짜로 뺨부터 한 대 철썩 갈겨 붙였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라 변명은 고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 셋은 결국 순경의 뒤를 따라 파출소까지 연행됐다.
파출소 안에서야 자초지종을 들은 순경은 그제서야 우리를 훈계방면했다. 그대신 순경은 우리 셋을 돌아가며 한차례씩 뺨을 후려갈겼다. 그것이 조그마한 소동을 피운 벌의 대가였던 모양이다.
파출소서 나오니 그때는 이미 통금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귀가는 이미 어려워 셋은 나란히 부근 여관으로 찾아들었다.
여관에 주저앉은 세 사람의 감정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순경에게 얻어맞은 뺨 한 대로 모든 승강이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허허…』 웃었다.
그러나 가장 궁금했던 것이 윤방일이가 승부에서 이긴 싸움의 비결이었다.
내가 물었다.
『야, 싸움얘기나 해봐라. 어떻게 이겼는지를…』
박상익이가 겸연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문밖에 나서자 마자 내가 이마치기로 방일의 가슴께를 치지 않았겠나. 일격에 승부를 낼 심산이었지. 방일은 생각대로 뒤로 벌렁 나자빠지더군. 나는 됐다싶어 넘어진 방일이 몸위로 덮쳤지….』 그런데 그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뒤로 넘어진 윤방일이가 「점프」로 뛰어드는 박상익을 보고 재빨리 오른쪽 발을 치켜들고 기다렸던 것이다.
박상익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얼굴을 윤방일의 구두 밑창에 틀어박고 나동그라졌다. 박상익은 코피를 쏟고 승부는 쉽게 끝나버린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우리는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놈아. 싸움을 꾀로 해야지 뚝심으로 하니. 미련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박상익을 놀려주었다.
박상익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좋은 친구였다.
윤방일이가 「극협」에 참여한 뒤를 이어 김영이란 친구가 다시 극단엘 입단했다. 김영은 이화삼과 같은 목포 출신으로 함께 일본서 연극활동을 하던 사람이다.
김영은 윤방일은 밑에서 기획일을 도우면서 일했다.
김영은 허우대가 크고 기운이 세어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김영과 박상익이가 어느날 우연히 또 시비가 붙었다.
그러나 박상익이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박상익이가 일방적으로 지고 말았다.
워낙 상대가 아닌 사이여서 박상익은 김영에 대해 포기를 한 줄 알았다. 그런데 박상익만은 그렇게 생각지 않은 모양이다.
다음 공연을 위해 연기자들이 옛 KBS 부근의 남산동 한 왜식 집에서 연습을 할 때였다.
겨울이어서 탐스러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도중 박상익이가 보이질 않았다. 모두들 그가 어딜 갔나하나 찾았으나 눈에 띄질 않았다.
한참 뒤 내가 화장실엘 가느라 복도를 나서니 박상익이가 뒷정원 저쪽 구석에서 권투연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얀눈을 뒤집어 쓴채 부지런히 두주먹을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 무엇 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상익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채 『보다시피 권투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김영 놈을 이기려면 이렇게 연습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박상익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호인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고인이 됐다.
폐가 약했던 윤방일은 1954년 7월 세상을 떠났고, 박상익도 그 뒤 활발한 연기활동을 보이다가 75년 4월 고인이 됐다. 윤방일이 세상을 떠났을땐 KBS 「라디오」에서 연극인으로는 흔치않게 추모 「프로」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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