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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리」<제60화>|남기고싶은 이야기들<저자 황재경>|「아나운서」생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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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국에서 돌아오던 여객선에서 나에게 학비를 대겠다던 세계주일학교 연합회 부회장「헤인즈」할머니는 약속대로 돈을 보내주었다. 그 할머니는 「피츠버그」에서 야채 장사를 하던 분으로 기독교 선교 활동에 아주 열심이었다.
뿐만아니라 나같은 젊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큰 낙으로 삼던 분이었다. 나는 「뉴욕」에서 신학교대학원 과정에 등록하여 1년간 시청각 교육방법을 공부했다.
시청각교육은 40년대부터 미국에서는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교육이 천자문을 암기하듯 이해력보다는 머리 위주의 교육이었다면 미국의 교육은 암기보다 이해력 개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과학적인 실험 실습과 눈에 의한 확인을 통해 이해시키는 것이다.
한번은 「디트로이트」시에 있는「잼·핸디」라는 시청각 교육 재료를 만드는 공장을 견학했다. 그 회사가 내건 구호는 『지식의 83%는 눈으로, 13%는 귀로 얻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후각·미각·촉각등으로 얻어진다는 얘기였다.
표본 조사로 얻어진 결과이겠으나 눈과 귀를 동시에 사용하는 시청각 교육으로 96%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랄만했다.
동양에서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만 눈으로 직접보고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만했다.
일본에 의한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함대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병사들을 한달동안 영화와 「슬라이드」등 시청각 교육 방법으로 훈련시켜 일선에 내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10여년 뒤에 한국을 방문했던 길에 시청각 교육방법의 도입을 역설한 일이 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뒤인 48년2월27일 「뉴욕」의 「레이크석세스」에서 열린 「유엔」소총회는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해야한다는 결정을 했다.
이해 초에 한국을 방문했던 「메논」인도회장은 북한공산주의자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실정을 보고하면서 남한지역만이라도 독립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나는「미국의 소리」방송국의 요청으로「유엔」총회장에서 그 장면을 직접 중계방송했다. 이 일이 있은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같이 일하자고 여러차례 권했지만 공부를 마친 뒤에 보자고 미뤘다.
시청각 교육은 대중을 상대로 한 일종의 대량교육 방법이기도해서 「매스컴」과 관련이 많았다. 서울에서 중앙방송국에서 일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면 「미국의 소리」방송국에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유엔」총회의 결정이 있은 뒤 48년5월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혜국회가 성립되고 이승만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미국내 한국인들은 두파로 갈려 서로 반목했다.
한 쪽에서는 이북을 그대로 두고 남한만 독립하면 반쪽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북이 통일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남한이 우선 독립해야 한다고 맞섰다.
나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정모란 자는 박헌영으로부터 공산당원증까지 받아 날뛰었다.
당신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이 박사에게 반대하자니 그렇게 되었다는 대답이었다.
「유엔」은 그해 12월12일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그때까지만해도 미국에서 살고 있었던 한국인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와이」사탕수수밭의 막일꾼으로 미국에 왔던 초기의 한국인은 마치 노예같이 천대를 받았다.
몇몇 망명객이나 유학차 도피했던 사람들도 나라없는 설움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흑인의 칼에 맞아 죽어도 보장금은 커녕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도 뼈저리게 느껴온 수많은 한국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누구보다도 더 기뻐했다.
그러나 일부 공산주의 사장에 물든 사람이나 이 박사를 반대하는 파에서는 조국을 헐뜯기까지 했다. 요즘도 교포사회가 갈라져 누워서 침 뱉는 추태를 부리고 있는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왜 이렇게 단합이 안되는지 안타깝기만하다.
나는 신학교 재학중에도 「미국의 소리」방송국을 위해 객원「아나운서」로 일을 도왔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뉴스」를 직접 전했고, 이박사의 취임사도 녹음 「테이프」를 가져다가 방송했다.
1년간의 공부를 마친 나는 49년6윌23일「미국의 소리」방송국에서 한국어 방송 「아나운서」로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6·25동란이 터지기 꼭 1년전의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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