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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개가죽나무에 말라비틀어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중년 여인의 피부처럼 내부로부터 조낙이 조짐이 보이는 잎새 사이로 가혹한 시간이 넘나든다. 윤기가 가셔 성글어진 수섭들. 삼동을 벗고 지낼 나무의 숙명이 9월부터 춥다. 어느새 수심으로 정력을 모아들이는 나무들의 월동준비, 그 조바심.
잔디가 몸살을 앓는 가을 경원에 잡초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큰 것들은 큰 것들대로, 작은 것들은 작은 것 대로 제가끔 열매를 준비하느라고 수선을 피우고 있다. 땅에 바짝 붙은 애기 풀까지 모두 다 열매를 열리느라고 앙상하다.
성숙에 필요한 시간을 차단 당한 애기 풀들의 조급한 얼굴.
뿌리에서 스며드는 조낙에 대비하는 끈질긴 종족보존의 그 열망….
앞터의 건축장에서 전기톱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탐조등 같은 두 눈을 휘번득거리며 「크레인」이 밤새 흙을 퍼 옮기고 막걸리를 인 아낙들이 물러간 자리에서 인부들이 혈전을 벌인다. 대팻밥을 대우며 흥겨운 꼬마들, 지붕을 올리기 전에 찬 서리가 내릴까봐 초조한 집주인.
만국기가 홑 날리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차전놀이를 하고 있다.
전포를 입은 대장이 지휘봉을 흔들 때마다 함성이 터져 하늘을 메운다. 조제품 악기를 들고도 흥겨운 꽹과리 부대, 엄마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행복감에 상기하는 1학년의 꼬마들. 한 장에 백 원하는 김에 만 밥들을 먹으며 차일도 없는 땡볕 속에서 아이를 가진 다복함을 신에게 감사하는 늙은 아버지. 야단을 맞아가며 「셔터」를 눌러 시간을 정지시키려 바둥거리는 엄마들, 팥 주머니로 두들겨 부순 종이공 속에서 호기있게 날아오르는 회색 비둘기들.
고추 마늘이 풍성하게 쌓여있는 경동 시장에 주부들의 한숨이 쌓인다. 엊그제 2천 원 하던 호고추가 4천 원으로 뛰어 오른 기적의 저자. 송이버섯을 만지다 못 사고 돌아서는 발꿈치에 욕설이 매달리고, 깨도 마늘도 남의 나라 물건처럼 낮이 실어진 장터 채소 값이 내렸다고 생색을 내는 장인들 옆에서 아직도 배추 값이 무거워 휘청거리는 아낙들의 다리.
가을의 들판에서 쭉정이만 줍는 농부들이 보인다.
노풍이라는 이름의 피해. 개가죽나무도 열매를 이고 있고 난쟁이 애기 풀들도 씨앗을 잉태한 이 가을에 빈 손을 들고 들만에 서야 하는 농부의 허탈감.
그것은 기계로 찍어낸 지폐로 보상될 아픔이 아니다.
진흙을 골라 볍씨룰 치고 양수기로 지심의 물을 뽑느라 밤을 새우고 태풍과 병충해·장마와 가뭄을 모두 견뎌 싸워온 노역의 역사, 이제 하늘에 날려보낼 비둘기도 없이 그 시간들을 태워 없애는 들판의 연기, 쭉정이만 줍는 농부의 허무.
손에 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하나씩 털어 버리고, 나목이 되어 들판에 서있는 그날을 위해 내 생명도 준비를 시작할 계절이 왔다. 손에 들고 둥에 진 욕심과 아집, 아직도 갈피를 못 잡는 방황과 야망, 일상 속에서 마비되어 가는 나를 깨워야 한다.
이 가을에 나도 청마처럼 차라리 바위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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