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강권|이강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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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관의 신발이 언제고 내 발에 걸린다. 열 켤레가 넘는 신발이 항상 우리 집 현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기에 바빠 신발 가는 곳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발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라』고 몇번씩 타일러도 말할 때뿐이다. 화를 내어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문자 그대로 쇠귀에 경읽기였다. 내가 원하는 「현관 깨끗해지기」와 아이들이 원하는 「먹이 찾기」와는 서로 다른 목표였다.
아이들 스스로가 현관이 깨끗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하다.
이 서로 다른 사정을 외면하면서 「신발은 신발장에」라는 구호만 외쳐 보았자 허사라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닫는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가족 회의다.
재미 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족 회의」라는 말을 던져 보았다. 그게 뭐냐고 막내 놈이 묻는다. 아버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각으로 일을 결정한다는 요지의 설명이 한차례 오간 뒤 나는 가족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내겐 내대로 속셈이 있었고, 애들로 보면 일단 신기한 것이고 보니 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들의 사정이 될 수 있었다.
회의의 의제가 「오는 일요일을 어떻게 보내는가」로 낙찰이 되었다. 아이들 스스로가 결정한 의제였다. 나로서는 별 탐탁지 않은 의제였다.
그러나 회의가 결정한 대로 아이들과 갈이 나는 공원으로 공차기하러 나갔다. 내가 노리고 있었던 것은 다음 가족 회의에 미루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의제가 선정될지 어떨지는 모른다. 또 일이 성사 되지 않고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아니다. 애초에 「구호 외치기」의 무용론을 인정한 나다. 이 말의 뜻은 아이들 스스로가 결정하는 의제가 「신발 치우는 방법의 모색」 바로 그것이 되지 않는 한 나의 목표 달성을 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강권」은 일시적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깨끗한 현관을 영원히 얻는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아이들 스스로가 내가 원하는 의제를 택하기를「도우며 기다려야」했을 뿐이다. 얼핏보기에는 내 방법이 시간 소비에서 그치고 마는 것 같으나 멀리 보면 그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음대 교수>

<필진>
본지의 「칼럼」 『파한잡기』를 부활 시켰습니다. 첫 필진은 전병재 교수 (연세대·사회학)·이강숙 교수 (서울대 음대)·임헌영씨 (문학 평론가)·이난영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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