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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제59화>함춘원 시절-??????(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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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개업에 열중하고 있던 l93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사상 획기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경의전이나 「세브란스」와는 달리 우리 한국인의 자본으로 외과대학이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교수진도 모두 한국인이었으니 당시 사정에 비추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1938년5월에 설립된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설립자는 김두수씨로 되어 있으나 그는 애당초 여의전 설립에 전 사재를 희사한 김종익씨의 아들이다.
전라도 순천의 2만석꾼으로 이름난 김종익씨는 사재를 내놓으면서 조건을 제시했는데 외과대학을 세우되 교수진은 꼭 한국인으로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때인지라 그의 뜻이 완벽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으나 교장을 빼놓고는 모든 교수 자리를 한국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우리 의학교육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으니 김종익씨의 높은 뜻과 안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8·15해방으로 일인이 물러난 함춘원에 여의전 교수진이 옮겨옴으로써 혼란기 우리 의학교육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된 것이다.
어떻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출발하면서 교장이 임명되었는데 뜻밖에도 일인「사또·고오조」(좌등강장)씨가 아니겠는가.
그때 의료계에서는 당연히 정구충 박사가 초대교장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여의전설립에 정박사의 공로는 지대했었다.
1895년생인 정박사는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오오사까」(대판)고등의 학교로 유학한(19l2년9월)의료계 원로다.
서울 종로3가에서 정구충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정박사는 이인 변호사(전 법무부장관와 함께 김종익씨의 뜻을 받들어 여의전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이 교장만큼은 일인이 맡아야 한다고 못을 박는 바람에 정박사는 7년 후 8·15해방 뒤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38년 가을에 1기생 50여명을 뽑았고 그 제1화 졸업생 47명(한국인 여자43명, 일인여자 4명)이 l943년에 배출됐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인랑 국복진 국순화 김금자 김마리아 김석자 김의진 김임기 김자향 김정옥 박정희 성악정 송교 송량근여 신석자 신육저 신용혜 안인직 오순석 왕순임 전숙근 유호숙 윤함복 윤혜량 이석희 이순희 이용희 이금춘 임명순 조정희 진영덕 진종순 최구십 최난패 최덕경 최정선 한봉화 한장순 홍숙희 홍승린 황명순 황정례 황진주
초창기 이후 여의전교수로 활약한 이는 대부분 우리 함춘원 출신이었는데 특히 나의 동기동창인 이종륜군(전 전남의대학장)은 창설 때부터 공로자다.
김호식 박사도 이군과 옛과때부터 후학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1939년에 본과1학년이 되면서 나세진 박사(성대3회 졸·서울대의대명예교수)가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생리학은 이종륜군이 맡았다.
이어서 40년에는 허규 박사(성대3회 졸)가 미생물학교수, 오진섭 박사(성대3회 졸·서울대의대명예교수)가 약리학교수, 이제구 박사(성대 8회 졸·전 서울대의대학장)가 병리학교수, 이갑수 박사(20년 경의전졸)가 내과교수, 정구충 박사가 외과교수로 취임했다.
정박사 밑에 이주걸 박사와 김시창 박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피부과교수 조병학 박사(32년 경의전 졸·현 조병학 피부비뇨기의원 개업중). 안과교수 김희준 박사(32년 경의전 졸), 소아과 교수 김덕성 박사가 각각 임명되었다.
41년에 제2외과교수로 최상채 박사(나의 동기동창), 산부인과교수로 신웅호 박사(성대3회 졸)가 임명됨으로써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초유의 여자외과대학으로서 모양을 갖춘 셈이다.
당시 여의전 교수 임명과 함께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이는 이제구 박사다. 그는 당시 가세의 약관에 정교수가 된 것이다.
여의전은 8·15해방 후 서울여자외과대학(1948년5월22일), 수도의대(1953년3월1일)로 바뀌었고 나중 운영에 곤란을 받아 우석의대·고려대의대로 탈바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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