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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제59화 함춘원 시절-김소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애숭이 의사 시절>
l924년 경의전을 졸업한 나는 평범한 개업의사로 일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학문에 대한 열의가 뜨거웠고 포부가 컸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에 남아 교수가 되기를 갈망했다.
더군다나 경의전이 곧 외과대학으로 승격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으로서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은 일본이나 독일로 유학을 갔다.
나도 일생에 한번 중대한 결심을 해야할 기로에 선 것이다.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학자가 되는 것이 나로선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병리학교실에 들어가 2, 3년간 기초 의학을 다지고 다음에 내과를 전공하리라 결심하고 24년4월1일자로 경의전 조수발령을 받아 병리학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해 8월23일 애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조선총독부의원의 유명한「이와이」(암정함사낭)냇과 교실에 들어가고 말았다.
병리학의 대가로 존경을 받던「이나모또」(도본귀오낭) 교수가 독일에서 돌아오기로 되어있어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병리학 교실에 들어갔는데 그에게 사고가 생겨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 중요한 이유다.
때 마침 유명한「이와이」교수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재l냇과 주임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주저치 않고 병리학 교실에서「어와이」내과로 옮긴 것이라.
이로부터 나의 내과 의사로서의 생활이 시작된 섬이다.
욋과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병원생활을 하는 의사들은 한번쯤은 간호원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상례다.
원래 의사와 간호원은「바늘과 실」과 같은 관계지만 햇병아리의사의 경우 이따금 노련한 간호원으로부터「바늘」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하물며 간호보조원 성격을 띤 몇몇 조선인 간호부(당시는 이렇게 불렀다)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일인 간호부가 일하고 있던 조선총독부의원에 들어간 우리 풋나기 의사들이「바늘」 대접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자랑 같지만 간호부사이에 내 인기는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나에게「비행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병실복도를 걷는 걸음이 어찌나 빠르고 특히 모퉁이를 돌아갈 때는「가운」이 날리도록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빨리 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도 기어이 간호부와의 사건이 생겼다.
조선총독부의원 의원이라는 판임관(지금 4급 공무원)발령(26년 12월31일)을 받고 나서 처음으로 병원본관 숙직의사로 근무하던 밤의 일이다.
당시 숙직의사는 본관 (현재 시계탑 건물)유료환자 숙직과 시??부(현재 치과 대학건물) 무료환자 숙직이 따로따로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졸업 후 처음에는 시??부만을 숙직하다가 2년이 지난 뒤 본관숙직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병원 숙직은 촌 각을 .다투는 응급환자나 자칫 생명을 잃는 중환자들 때문에 다른 어느 숙직보다 엄격하다. 그래서 숙련된 의사가 숙직 책임을 맡게되고 간호부 숙직도 각 병실에 있는 숙직간호부를 총감독하는 간호 부장 급에서 임명된다.
그런데 그날 밤 숙직책임을 진「이노우에」(정상) 간호부장이 아무런 보고도 없고 당연히 해야할 병실수행도 하지 않은 것이다. 얼굴조차 내밀지 않은 그녀가 괘씸해서 전화로, 호출하여 호되게 힐책했다.
만일 이 같은 사실이 상부에 알려지면 시말서를 쓰는 등 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이노우에」간호부는 다음날 아침 나를 찾아와서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백배 사과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컨대 그녀의 잘못을 너그럽게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나이 27세보다 두 배나 됨직한 노처녀「이노우에」간호부는 직위만 하더라도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장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내가「이노우에」간호부를 야단친 것은 젊은 패기로 그런 것은 아니다.
첫째는 풋나기「조선인 의사」라고 얕잡아 봤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속셈이었다.
둘째는 그 시걸 단지「조선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일인들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여기저기에 완연한 까닭에 잠재해 있던 민족적 감정이 폭발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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