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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중문화는 흐른다 「남들이 하니까…식 유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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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내의 이름은 남수자인데 말끝마다 「남들은…」운운해서 남편인 내가 「남들은 여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내는 하루종일 집에 들어앉아 다섯 살과 네 살짜리 남매를 키우면서 고작 신문이나 잡지가 아니면 「라디오」나 「텔리비전」을 보는 정도의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그런 아내가 어떻게 잘사는 남들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대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신석상의 「콩트」『남들은 여사』에서>
남들이 문제다. 남들처럼 호화 응접가구나 모조품 그림을 못 걸어놓고 사는 것은 고사하고 집 한 채 장만 못하는 남편 곁을 결국 「남들은 여사」는 떠나고 만다.

<「매스·미디어」홍수>
남들이 자신의 가정을 파탄시킨 셈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돌릴 「남들」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티크」장을 자개장으로 바꿔야하고 서양화를 걸어 두었던 집에서는 동양화·민화로 바꿔 걸고 호화판 응접가구를 놓아야한다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미니」는 「미디」로, 「미디」는 다시 「맥시」로 바뀌는가 하면 「블루진」일색이 되기도 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하는 것이다. 신발의 뒷 굽은 좁은 것이 넓은 것으로,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 다시 굵고 두꺼우면서 높은 것으로 변한다.
「넥타이」는 좁은 것에서 넓은 것으로, 남자들의 옷은 단색에서 줄무늬로, 줄무늬는 「체크」무늬로 변한다. 유행에 쫓겨서 월급을 털고 생활비에 쪼들린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남이 판단한 것을 전달만 받는 대중사회의 어쩔 수 없는 타자지향적 속성 때문이라고 전병재 교수(연세대·사회학)는 설명한다. 개인의 주체적 판단은 흐려지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
매일 7백만부 이상의 신문이 나오고 주·월간지가 월9백만 부를 육박한다. 「라디오」가 1천5백만호를 넘어섰고 TV수상기가 4백만대 이상 보급되고 있다.
한국인의 「매스·미디어」접촉시간이 매일 5시간 이상이란 통계도 나오고 있다. 활동시간의 3분의1정도를 「매스·미디어」와 같이 보낸다고 생각하면 그 영향력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 추진과정에서 화려한 「비전」은 계속 제시되고, 이를 달성하는 사람보다는 그 기회를 못 갖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매스·미디어」에 매달러 위안을 얻게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실용성은 뒷전에>
대중문화는 그래서 향락적·소비적 성격일 수밖에 없다. 싫증을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호기심에 영합하는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한다. 가치관이 단순한 사회일수록 이 같은 신기한 것에 일제히 동조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고 박용혜 교수(서울대·교육사회학)는 말한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하다. 「붐」이 많다. 여기에 국가정책으로 추진하는 수출제일주의가 가세하고 있다. 「새것」「새로운 기호」를 세계적인 안목으로 찾아내야만 살아남는다는 수출업자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붐」을 예고해 준다.
실용성을 따지지 않는다. 63년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미니·스커트」만해도 그렇다. 「마이·카」시대가 시작되면서 자동차가 소형화하자 여기에 맞춰 고안해낸 것이다.
그런데 67년 가수 윤복희가 한국무대에 이를 소개하면서 「미니」는 선풍적인 유행의 바람을 탔다. 「버스」밖에 탈 수 없고 대중 앞에 나서야하는 사람에게까지 「미니」는 휩쓸었다고 김미사 교수(성심여대·복장사)는 지적한다. 50년대 중반에 들어온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헵번」은 의자생활을 해보지 못한 한국인까지도 「맘보」바지를 입도록 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어부들의 작업복에서 유래했다는 「몸빼」에 가까운 바지가 유행의 물결을 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매스·미디어」와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은 유행의 전파속도를 빠르게 할뿐 아니라, 내용도 다양하게 해준다.
광고를 통하기나 대중문화의 내용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생산업자들은 또 대중의 생활「패턴」을 예사로 바꿔놓는다.
한때 『「콜라」를 마시지 않으면 문화인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무색 음료를 마셔야 한다』로 넘어갔다. 광고를 본 아이들에게 졸려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간다. 「없는 수요」를 부단히 창출하는 생산업자들에 대중이 끌려가는 것이다. 대중 문화 속에서 「초연한 개인」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유행풍조 속에 거센 바람을 안고도 분수를 지켜 그 바람을 소화할 수 있는 개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구화로만 치닫던 한국가정에 70년대 들면서 「복고」라는 또 하나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집집마다 민속도자 하나쯤 놓아둬야 하는 것으로 되고 있다. 경기도 여주·이천의 두 세 군데서 구워대던 도자가 동이 나기 시작하자 대번에 가마가 20여 군데로 늘었다.
수원·괴산·대전·강진 등 전국 곳곳에 민속도자 가마가 생기기 시작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고물장수나 사가던 옛날의 목제가구·토기 등이 호화가구 옆에 놓이는 장식품이 되면서 너도나도 몰리는 바람에 시중의 매매가가 10년 동안 1백배를 넘게 뛰고 제주 절구통은 동이 났다. 민화도 마찬가지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몇 백원 하던 그림이 몇10만원을 홋가하는 것도 있다.

<활발한 국학연구>
수집「붐」은 현대화에까지 미쳐 어떤 전시장에서는 1백20%의 작품이 팔리기도 한다.
다분히 투자라는 경제행위의 성격이 짙다. 그렇지만 복고취미에서 시작된 이같은 풍조는 정부의 문화재 관광자원화 정책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고 김원룡 교수(서울대·고고학)는 말한다.
불국사 기둥을 「시멘트」로 갈아 끼우고 번드레하게 꾸며 관광「달러」를 벌겠다고 하는가하면 현충사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상업주의가 민속품을 예술품으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 그것도 수지맞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70년 들어서면서 정부가 경주의 고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서 경주관광 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추진한 때다.
1백억「달러」수출로 나타난 경제적 자신감이 「내것」에 대한 애착을 낳고, 국학 연구열이 일부 학자사이에 높아가면서 사회적 「무드」로 번져가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이 같은 분위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면서「붐」으로 조성된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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