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를 복권 뽑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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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루한 장마가 짜증스럽다. 물가고·교통지옥·공해가 서민들에겐 힘겹다. 거기서「스트레스」가 겹친다. 산업사회에서「스포츠」경기는「스트레스」해소의 큰 기능을 떠맡고 있다. 「빅·게임」이 있는 날의 장 충 체육관이나 서울운동장은「게임」자체와는 직접 인연이 없는 감정 폭발의 무대다. 통쾌한「슛」을 보고 터지는 환호에는 목구멍 어딘가 걸려 있는 것 같은 불만을 한꺼번에 토해 내려는 안간힘이 묻어 나온다.
그래서 전반적으로「스포츠·팬」이 늘어나고 특히 고교야구 같은 종목은 해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른다. 동기야 어떻든 간에「아파트」분양의 현장보다 운동장 쪽에 더욱 많은 인파가 몰린다는 것은 국민보건이나 정신위생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스트레스」해소를 위한「스포츠」라면 권투가 단연 으뜸이다. 체육관에 나가 있는 관중들이나「텔레비전」앞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들은 사각의「링」위에서 주먹들이 작렬하는 것을 보고 속이 후련함을 느끼는「새디스트」들이 된다.「로마」제국의「콜로시움」의 재현 같은 이야기다.
무리인줄 알면서도 오영호 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 본 것도 한국사람들의 이런 정신상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공위성으로 중계되는 시합의 내용을 보니 무모했고 미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팔 길이·실력, 어느 모로 보나 상대가 안 되는 것을 잘해서 한방 제대로 먹이면「타이틀」과 돈이 한꺼번에 굴러든다는 복권 뽑는 심리로 대어 들었지만 「링」위에서는 실력만이 통했다.
과거에 어떤「아나운서」는「스포츠」경기를 중계할 때마다 화랑정신을 찾았다.
홍수환은 사전오기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이게 병폐다. 화랑정신이 투철하고 김치·깍두기 먹은 다부진 투지만 있으면 기량이 시원찮고 전략이 엉성해도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권투도 기술이나 정보수집을 과학화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는 교훈을 이참에 다시 한번 되새겨야겠다. <윤경헌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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