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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탤런트 스크린 폭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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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에 대히트한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한 장면. 과외 교습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간 통닭집 딸 수완(김하늘)이 심각한 표정으로 숫돌에 칼을 간다.

이를 쳐다보던 수완의 엄마(김자옥)가 딸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으며 던지는 한 마디. "이 년아, 불 켜고 갈아." 관객은 박장대소다.

18일 개봉하는 '오! 해피데이'시사회에서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장면. 자신을 괴롭히는 희지(장나라)를 데리고 현준(박정철)이 소주를 마시고 있다.

식당 주인인 욕쟁이 할머니(김수미)가 "우리 아무 사이 아닌데요"라고 극구 부인하는 현준에게 비수처럼 날리는 한 마디. "엉 까지마, XX야." 그러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빨리 와, XX놈아. 얼래?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아가, 오니라~" 몇 분 안되는 장면이지만 확실하게 웃겨준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중견 TV 탤런트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충무로에 코미디 영화 붐이 불면서 코믹 이미지를 구축한 중견 탤런트들을 모시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한때 설경구를 비롯해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다진 '대학로' 출신들이 스크린을 수놓은 데 이어 이제는 '여의도'출신들이 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충무로에 새 피를 수혈하고 있다.

지난해 '피도 눈물도 없이'의 양택조, '가문의 영광'의 유동근 등에 이어 올해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자옥, '선생 김봉두'의 변희봉, '오! 해피데이'의 김수미, '황산벌'의 오지명, '빅하우스 닷컴'의 노주현 등이 대표적이다.

김수미는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로, 오지명은 '순풍 산부인과'의 엉뚱한 의사로, 김자옥은 '공주는 외로워'라는 노래까지 발표하며 '공주병 신드롬'을 일으켰던 푼수 연기로 특유의 코믹한 이미지를 굳힌 바 있다.

노주현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와 '똑바로 살아라'등 두 편의 시트콤을 통해 잘 생긴 '느끼남'에서 철딱서니 없는 중년 남자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대개 비중 있는 조연이나 카메오로 출연하지만 영화의 성격에 따라 주연을 맡기도 한다. 지난 4일 개봉한 블랙 코미디 '지구를 지켜라'의 백윤식이 그런 경우다.

그는 병구(신하균)에게 외계인으로 몰려 때밀이 수건으로 발등을 민 뒤 물파스를 바르는 따위의 모진 고문을 당하는 강사장으로 출연한다.

외계인에게서 지구를 지킨다는 황당한 설정과 그로테스크한 영화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서울의 달'에서 외모는 진지하지만 어딘가 실없는 이미지를 굳힌 백윤식의 캐스팅은 '딱'이라는 중평이다. 그는 삭발하고 1년 동안 작품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1억원이 넘는 출연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 출신들의 충무로행이 잦아진 이유는 뭘까. 제작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연기력이 검증된 데다 이미 TV를 통해 다져진 개개인의 특성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고 말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제작사 싸이더스의 배윤희 과장은 "TV에서 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일단 나오면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고, 1분을 나오더라도 확실하게 웃겨주고 들어가니까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최근의 코미디 영화들은 어떻게 보면 이들의 TV 이미지를 이용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의 기용은 영화 흥행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역으로 오지명을 캐스팅한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은 "흥행을 고려한다면 충무로 배우들 외에도 TV에서 지명도를 높인 조연들은 꼭 필요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 "안방극장에서 좋아하던 얼굴들을 코미디 영화에서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관객의 욕구를 제작자들이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는 최근 관객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상당 기간 중견 탤런트들의 활약은 늘어날 전망이다. '지구를 지켜라'처럼 공동 주연까지 노릴 수 있는 컨셉의 영화가 늘어난다면 이들의 참여는 단순한 '외도'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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