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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침체로 초라해진 상장기업…시가총액 < 순자산가치 총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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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차라리 회사를 정리하는 편이 주주들에게 훨씬 이익입니다. "

중견 상장기업 임원인 K씨가 지난 3월 주총을 마친 뒤 푸념조로 남긴 말이다. 증시침체가 이어지면서 주가가 기업의 자산가치에도 못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사업보고서(2002 회계연도)를 제출한 12월 결산법인 4백9개사 가운데 1주당 순자산가치(2002년 말 보통주 기준)가 주가(4월 4일 종가)보다 높은 기업수는 총 3백58개사로 전체의 87%나 됐다. 이들 기업이 당장 청산을 해 쥘 수 있는 돈이 주식을 모두 팔았을 때보다 훨씬 많다는 얘기다.

◆청산가치가 주가보다 큰 기업 많아져=사업보고서 분석이 가능한 4백9개 12월 결산법인들의 지난해 말 현재 순자산은 2백11조7천여억원으로, 시가총액 1백58조5천여억원의 1.33배에 달했다.

1년전에 비해 순자산은 9조8천여억원 늘어난 반면 시가총액은 81조9천여억원이 줄었다.

이에 따라 주가를 주당순자산가치(BPS)로 나눈 주가순자산배율(PBR)이 지난해엔 0.94였지만 올들어 0.56으로 뚝 떨어졌다. PBR는 주가가 1주당 순자산에 비해 몇배로 거래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PBR가 1보다 작으면 주가가 주당순자산가치를 밑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자산은 대차대조표상의 자산에서 부채를 뺀 금액으로 회사 청산시 주주가 배당받을 수 있는 금액과 같아 청산가치라고도 불린다.

분석대상 회사 중 PBR가 1이 안되는 회사는 3백58개로 87.53%에 이르렀다. PBR가 1을 넘는 회사는 51개로 지난해 1백18개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가총액 상위기업 중 PBR가 가장 높은 회사는 SK텔레콤으로 2.72였고 KT(1.80).삼성전자(1.78)가 뒤를 이었다.

반면 SK글로벌 분식회계의 직격탄을 맞은 SK는 PBR가 0.22에 불과했고 현대차.현대중공업도 0.5 내외였다.

PBR가 가장 높은 회사는 신성무역(6.58)이었고 라딕스(6.20).삼보컴퓨터(3.20).금양(2.87) 순이었다.

반면 PBR가 가장 낮은 회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한화섬(0.07)이었다. 이외에 세방기업(0.09).동부제강(0.09).신풍제지(0.09)등의 주가는 주당순자산가치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매출 늘었으나 주가는 약세=이처럼 PBR가 떨어진 것은 지난해 대부분의 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려 순자산이 늘어났지만 종합주가지수가 20% 가량 하락하는 등 주가의 약세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주가는 원래 기업의 자산가치에 수익성과 성장성 등을 감안해 시장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국내 상장기업들의 주가는 이라크전.북핵문제.SK글로벌 분식회계사태.카드채 부실 등 각종 악재가 겹쳐 성장성과 수익성은 고사하고 자산가치에도 못미치게 된 것이다.

일부에선 PBR가 1에 미치지는 것을 두고 국내증시가 저평가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가는 시장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김학균 수석연구원은 "청산가치는 장부상 드러난 과거의 가치이고 주가는 미래의 실적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 있다"며 "PBR가 낮은 '자산주'들은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큰 약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연구원은 이어 "일부에선 마이크로소프트의 PBR가 삼성전자의 2.5배에 이르지만 주가수익률(PER)이 3~4배에 이르는 것을 두고 한국증시가 저평가됐다고 주장하나 이것이 바로 미국증시와 한국증시의 유동성 등 각종 차이가 드러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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