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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 리포트] 고궁음악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가야금 명인 황병기(78) 선생이 창덕궁 낙선재 대청마루에 올랐습니다. 가야금 열두 줄을 퉁기고 때로는 문지르며 낙선재 안뜰을 음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뒤이어 무대에 오른 안숙선(65) 명창도 흥보가 한 자락을 부르며 관객을 쥐락펴락 했지요. 높은 마루에서 명인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마당의 흙과 관객, 낙선재를 둘러싼 꽃담에까지 흩뿌려졌습니다. 지난달 20일 열린 창덕궁음악회 시연회의 한 장면입니다.

창덕궁뿐 아니라 덕수궁·경복궁과 종묘에서도 고궁음악회가 열립니다. 그 현장에 찾아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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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 낙선재 음악회에서 거문고 산조 ‘침향’을 연주하는 황병기 명인. 2 낙선재 음악회에서 안숙선 명창이 흥보가 ‘박타는 대목’을 부르고 있다. 3 김영숙(무용)·사재성(장구)·정재국(피리)·박용호(대금)·이기설(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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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에서 음악 공연이 열린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예전엔 궁궐 건물을 꼭꼭 닫아 놓는 것이 문화유산을 잘 지키는 방법이라는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 집이 빨리 폐허가 되듯, 궁궐도 손때가 묻어야 오히려 생명력을 얻어 더 잘 지킬 수 있다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행사인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는 2009년 정식으로 시작해 올해로 6회째다. 궁궐 입장료만 내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이 행사엔 지난 5년간 누적 관객 약 25만 명이 다녀갔다.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안 명창은 “고궁음악회는 국악의 정통성을 지키면서도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며 “궁궐은 트인 공간이라 호흡하기 좋고, 건축의 느낌도 좋아서 소리가 더 잘 나온다”고 말했다. 황 명인은 “우리 집이 창덕궁 근처였다. 나는 가회동 꼭대기에서 태어나 계동에서 자랐다. 집 사랑방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편안하다”고 말했다.

야외 공연이 가능한 봄과 가을이 고궁음악회 시즌이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봄 공연이 여름 공연으로 미뤄졌다. 공연 주제도 ‘희망과 휴식, 치유의 음악으로 초대’로 잡았다.

낙선재에서 음악과 함께 듣는 옛 사람 이야기

김만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극인 유인촌.

창덕궁 음악회는 두 종류가 있다. ‘낙선재 음악회’와 ‘창덕궁 산책’이다. 올해 낙선재 음악회는 조선의 여인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제주의 거상 김만덕, 정희왕후, 그리고 경빈 김씨가 주인공이다. 20일 시연회에서는 연극인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스토리텔링을 맡아 김만덕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만덕은 1739년생입니다. 영·정조 시대를 산 여인이죠. 당시 조선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농업과 시전이 활발해져 상인이 배출되고,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실학사상으로 여인의 삶에도 변화가 오지요. 만덕은 그 중요한 주체가 된 인물입니다.”

만덕은 제주도에서 양인(천민이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관기(관청에 소속된 기생)로 전락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23세에 양인 신분을 회복한 그는 제주 포구에 객주를 열고 육지와 섬의 물건을 거래하는 유통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다. 그러다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많아지자 전 재산을 풀어 제주 백성을 먹여 살린다. 정조 임금은 그에 대한 상으로 만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한다. 만덕의 소원은 임금이 있는 궁궐을 한번 우러러 보고, 천하명산 금강산을 가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 여인이 육지 땅을 밟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습니다. 정조는 ‘과연 큰 인물이다. 국법을 어길지라도 들어주도록 하라. 욕심을 부릴 만한데 무소유를 택했구나’라고 하지요. 만덕은 제주 여인으론 처음으로 한양 땅을 밟는 새 역사를 썼습니다.”

이어서 안 명창이 판소리 흥보가 중 ‘박 타는 대목’을 불렀다. 흥보가 박에서 쏟아진 금은보화를 혼자 갖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만덕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유 전 장관은 이날의 공연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됐다. “만덕은 ‘풍년엔 흉년을 생각하며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철학을 담아 마련한 음악회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가 되길 빕니다.”

22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에 낙선재음악회가 열린다. 15일은 ‘김만덕 이야기’, 8·22일엔 ‘조선의 여인 경빈 김씨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문고산조·가야금병창·판소리와 살풀이춤·입춤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왕의 휴식 공간, 후원에서 만나는 음악과 춤

지난달 28일 이른 아침부터 창덕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전 9시부터 열리는 ‘창덕궁산책 음악회’를 예약한 이들이다. 관람 인원이 제한된 창덕궁 후원에서 열리기 때문에 한번에 40명만 예약을 받는다. 이날은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이 ‘정조와 세종은 무엇이 달랐나’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창덕궁의 궐내각사(闕內各司·궁궐 안에 있던 관청)가 정치와 논쟁 등 골치 아픈 일들이 이뤄지는 곳이었다면, 후원은 쉬는 곳이었어요. 옛날엔 임금이 내리는 가장 큰 선물이 음악이었습니다.”

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주합루(宙合樓) 권역이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하던 1776년 건립한 2층 건물로, 현판 글씨는 정조가 썼다. 1층은 규장각으로 사용했다. “주합은 자연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노론·소론, 남인·북인으로 나뉜 걸 넘어서서 하나가 되자는 탕평 정신을 표현한 이름이죠.”

정조와 세종은 왜 훌륭한 왕이라는 칭송을 받을까. 박 실장은 “세종에겐 집현전, 정조에겐 규장각이라는 싱크 탱크(Think Tank·지식 집단)가 있었다. 두 임금 모두 인재를 잘 길러 적재적소에 배치해 신바람 나게 일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금 명인 박용호(68)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영화당(暎花堂) 마루에 올랐다. 그의 대금에서 ‘요천순일지곡(堯天舜日之曲)’이 흘러나왔다. ‘요순시절의 하늘과 해’라는 뜻의 곡 이름엔 중국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가 오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후원 음악회에선 마이크나 스피커를 쓰지 않고 생 소리를 들려준다. 까치부터 딱따구리까지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추임새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는 배경음악이었다. 관객들은 모래 밟는 소리조차 음악에 방해가 될까 미동도 하지 않고 대금 소리를 들었다.

덕수궁·경복궁·종묘서도 공연

존덕정(尊德亭)으로 자리를 옮기자 안숙선 명창과 조용복 고수가 자리를 깔고 기다리고 있었다. 존덕정 안에는 정조 임금의 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걸려 있다. 만개의 물을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이 모든 백성에게 마음과 은혜를 베풀겠다는 정조의 다짐이 담긴 글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술동이를 쌓아놓고 신하들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이 일렀다. “요즘 경들은 당파가 다르면 조문도 안 간다니 사실이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오늘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나가 되라. 취하지 않는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박 실장은 “정조의 건배사는 ‘불취무귀(不醉無歸·취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였다. 반면 세종은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술을 마셔도 중간에 적당히 그치는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술을 대하는 태도에서만큼은 정조와 세종이 확연히 달랐던 셈이다.

안 명창은 “요즘 누구나 마음이 무겁다. 옛 사람들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희망을 갖고 살았는지 전통 음악에 너무나 잘 나와 있다. 나는 판소리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먼저 단가(짧은 노래) 한 곡을 뽑고 나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들려줬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풋풋한 사랑놀음이 새소리 그득한 왕의 정원에서 펼쳐졌다. 명창의 소리를 코 앞에서 듣는 진귀한 경험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화답했다.

마지막 산책 장소인 기오헌(寄傲軒)에선 김영숙(61) 명무의 춘앵전 공연이 열렸다. 춘앵전은 이른 봄날 아침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를 표현한 궁중 무용이다. 순조임금의 아들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창덕궁산책 음악회는 그 밖에도 ‘국왕과 세자의 사랑 이야기’ ‘정조와 효명세자 이야기’ 등을 주제로 열린다. 아쉽게도 6월 관람 티켓은 이미 매진됐다. 9월 7일부터 10월 12일까지 하반기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한편 덕수궁 함녕전에선 15일까지 토·일요일 오후 7시 30분에 어린이를 위한 ‘동화음악회’가 열린다. 2D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동화 ‘보이지 않는 아이’ ‘이젠 안녕‘ 등을 퓨전 국악과 함께 감상하는 시간이다. 하반기 공연은 9월 13일~10월 5일에 마련된다. 종묘 재궁에선 6월과 9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음악과 춤, 해설이 함께하는 종묘제례악 공연을 볼 수 있다. 대규모 궁중연향과 민속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경복궁음악회는 10월 4~12일 매주 토·일요일 오전 11시, 오후 1시에 열릴 예정이다.

이경희 기자 ,
사진=장진영 기자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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