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1)|<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60)|정비석<제자 정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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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설『자유부인』관계로 대학교수로부터 부당한 공박을 당하게 되자, 나는 작자의 의도가 너무도 유린된 데 분격한 나머지 자기변호를 위해서도 반박문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논전을 몇 차례 거듭하는 동안에 독자의 수효는 날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갔다. 그리고 일부 독자들로부터는 협박장과 공갈전화가 날아드는가 하면, 다른 독자들로부터는 어떤 압력을 가해와도 끝까지 굴하지 말고 소신대로 써 나가라는 격려의 전화와 편지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마침「한글파동」이 있던 때 였는데, 『자유부인』의 남 주인공 장태연 교수가 공교롭게도 한글학자인 관계로 나는 소설을 통해 문교부가 주장하는 「신한글 철자법』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나왔다.
그 때문에 소설의 인기는 한국천지를 휩쓰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식층 독자나 무식층 독자를 막론하고『자유부인』을 읽지 않고서는 술좌석에서조차 대좌에 끼여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일약 천하의 명사가 되어버려서 거리에 맘대로 나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내가 소설에서 쓴 이야기는 그날로 유행어가 되었고. 소설 속의 사건 하나하나가 시중에서는 현실적인 사건처럼 되어버렸다.
『자유부인』에 대한 독자 대중의 관심은 그토록 놀라왔던 것이다.
사실『자유부인』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글자 그대로 선풍적이었다.
나는 그럴수록에 나 자신을 평상시와 다름없이 냉정성을 견지해 가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바깥 세상에서는 어떻게 떠들든 간에 나는 그런 인기에 추호도 현혹되지 말고 내가 계획했던 대로의 작품을 써 나가는데만 최선의 노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워낙 말썽이 많게 되니, 세상은 나톨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떤 여성단체에서는「여생모순 죄」로 시경에 고소장을 내는 바람에 시경에도 불려 다녀야 했고, 치안국에서는 남한의 부패상을 소설로 폭로하여 공산주의들에게 이적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나를 치안국에 연행해다가 취조까지 하였다.
그도 그릴 것이, 그 당시 북괴는 남한의 부패상을 선전하기 위해『자유부인』을 그들의 사상교육의「텍스트』로 쓰기까지 했다는 풍문이 떠돌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중에는 육군 특무부대에서조차 나의 사상성이 의심스러워 본격적인 취조에 착수할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만약 그때『자유부인』을 연재하는 신문이 정부의 기관지인「서울신문」이 아니었던들, 그리고 나의 성분이 이북에서 추방을 당한 지주출신이 아니었던들, 그리고 또 당시의 상무였던 임근수와 편집국장이었던 고제경 두 분이 작자인 나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지 않았던들『자유부인』은 끝을 내지 못하고 중단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 있다.
게다가 말썽이 많아 갈수록 새로운 독자들이 자간만 불어나는 판인데, 정음사 사장 최영해는 연재 중에 상편을 책으로 출판하여 대대적으로 선전을 해대는 바람에 일시는 온 세상이 『자유부인』세상이 되어버린 느낌조차 없지 않았다.
그 바람에 서울신문은 가두판매 부수만도 5만부 나갔다고 하니, 신문 연재소설로서는 말썽도 많이 일으켰고, 신문도 많이 팔리게 한 기록적인 작품이었다.
그후에 영화화되어, 영화로서도 관람객이 기록적으로 많았었다.
만약 먼 후일에 어떤 사회과학자가 1950년대의 한국의 사회사나 풍속사를 쓰려면『자유부인』만은 한 번쫌 읽어봐야 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자유부인』의 독자가 그토록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준 사람은 오늘날까지 거의 없다. 작자인 나는 그저 쓸쓸하기만 할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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