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희 성공과 좌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국가개조에 나설 ‘구원투수’로 발탁됐던 이유는 그의 강단 있는 성품 때문이었다. 만 20세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안 후보자는 1980년 검사로 임용된 지 3년 만에 춘천지검 영월지청으로 발령 났다. 그는 그때까지 관행으로 여겨졌던 지역 유지들의 비행을 샅샅이 수사했다. 별칭대로 그는 ‘너무 잘 드는 칼’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지역 유지들이 ‘이상한 젊은 검사가 와서 못 살겠다’며 서울 대검찰청에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고 전했다. 초임 검사 시절엔 저질 연탄 사건을 수사했다. 처음엔 전두환 대통령도 서울지검장에게 격려 전화를 할 정도로 여론이 호의적이었지만 이후 ‘국내 연탄업계를 다 망하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검찰총장까지 옷을 벗게 했다. 하지만 안 후보자는 “그 수사 뒤에 연탄 품질도 좋아지고 업체들도 망하지 않았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그의 스타일이 독이 돼 검사장 승진 인사에서 두 번 밀려났다. 안 후보자는 “원칙을 주장하니 곱지 않게 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승진을 못하면 대개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한다. 하지만 안 후보자는 언젠간 빛을 볼 거라며 버텼다. 그런 그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사 중의 검사라는 대검 중수부장에 발탁했다. 그는 자신을 임명한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실세였던 안희정 현 충남지사 후보와 최도술씨를 구속하는 등 정치인 40여 명을 기소했다. ‘국민검사’라는 호칭이 이때 생겼다.

 2006년 검찰 몫의 대법관이 됐다. 청문회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서울 홍은동의 오래된 아파트에 20년 넘게 살았고 재산도 다른 법조인들보다 현저히 낮은 5억원 정도여서 ‘역시 안대희’라는 말이 나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곤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으며 박근혜 후보캠프에 합류했다. 정계에 뛰어든 게 의외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나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왔다”고 명분을 세웠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엔 권부에서 밀려난 듯이 보였지만 세월호 참사가 ‘안대희’를 불렀다.

 그러나 국민이 기억하던 ‘안대희’와 ‘총리 후보자 안대희’는 차이가 있었다.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지 6일 만에 그는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해야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평범한 한 시민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박성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