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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구리 '세기의 대결'… 그들은 역시 최고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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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세돌 9단(오른쪽)과 구리 9단이 25일 10번기 제5국을 두고 있다. 한·중 대결에다 55년 만에 찾아온 승부 바둑의 백미로도 주목받고 있다. [사진 중국기원]
박정상

이세돌이 ‘힘들게’ 이겼다.

 25일 중국 윈난(雲南)성 중뎬(中甸·일명 샹그릴라)에서 열린 10번기 제5국에서 이세돌(31) 9단이 구리(31) 9단을 꺾었다. 3, 4국의 패배를 설욕하고 종합전적 3대 2로 500만 위안(약 8억7000만원)이라는 바둑 사상 최고의 상금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1959년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10번기’는 최고 실력자를 가리는 승부 바둑의 대명사였다. 중국인 우칭위안(吳淸源·100)이 1940~50년대 일본 바둑계를 평정한 무대였기에 ‘우칭위안 10번기’로도 불린다. 이세돌과 구리는 지난 10년 세계 바둑계 1, 2위를 다퉜던 기사. 그러기에 이번 대회는 한·중 바둑계의 상징적 승부라고 할 수 있다. 두 기사는 연초부터 한 달에 한 차례 대국, 총 10개월의 장정에 들어갔다.

 5국에선 서로 실수가 많았다. “후반은 확실히 이길 기회가 있었는데 놓쳐 유감이다. 서로에게 기회가 있었던 바둑이다.”(구리) “구리가 이길 기회는 많았고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후반 내가 역전시켰지만 다시 역전당할 뻔했다.”(이세돌)

 실수가 많은 만큼 불평도 있다. 한물간 승부사들의 대결이라는 폄하가 중국의 젊은 기사들에게서 흘러나온다. 구리는 2010년 삼성화재배를, 이세돌은 2012년 삼성화재배를 끝으로 더 이상 세계대회 우승을 못했다.

 이 때문에 “큰 승부에 명국 없다”는 탄식마저 떠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박정상(30) 9단을 27일 서울 왕십리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그는 김성룡(38) 9단과 함께 10번기 승부의 상징성과 가치를 누구보다 강조하는 기사다.

 - 10번기는 어떤 승부인가.

 “지난 100년 승부 방식은 변해 왔다. 1940~50년대는 10번기 시대로 두 대국자가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면 ‘치수(置數)가 강등(상대보다 약하다고 수긍하는 것)’되는데 누가 온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당대의 승부사들이 자존(自尊)과 열등(劣等) 속에 치른 대결이었다.”

 90년대 이후 바둑은 단체 승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한·중·일이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이다. 이번 10번기는 개인 중심의 승부에 대한 향수, 한·중의 경쟁, 최근 2~3년 눈에 띄는 1인자가 없는 시대상 등이 맞물려 성사됐다. 지난 4월 왕루난(王汝南) 중국바둑협회 주석은 “10번기는 일본을 휩쓸었던 우칭위안을 기억하려는 기획”이라고 말했다.

 - 두 기사 전성기가 지났다. 의미가 있을까.

 “물론 세계 제1위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기사 중 하나다. 이세돌이 말했다. ‘중국엔 구리 이후로 세계대회 2회 우승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좋은 바둑을 만들려는 의지가 대국자에게 있고 힘도 느껴진다.”

 - 실수가 많은데 좋은 바둑이라니.

 “실수는 승부의 압박감 때문이다. 그러나 반상을 끌어당기는 힘을 볼 때 역시 두 기사는 최고의 기사다.”

 - 그걸 아마추어가 어찌 아나. 쉽게 말해 달라.

 “의지가 중요하다. 좋은 바둑에 대한 의지 없이는 스케일 좁은 고만고만한 바둑만 나온다. 실수는 바둑의 가치를 평가하는 요인이 아니다. 안목을 넓히는 바둑이 좋은 바둑이다.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데 대국을 깊이 검토해 보면 두 기사가 얼마만큼 반상을 넓게 보는지를 알 수 있다. 프로들은 ‘힘든 호흡’을 느낀다.”

 박 9단은 긴장을 버텨내는 힘이 바둑의 세계를 넓힌다고 했다. 이번 승부를 마치는 데는 한 달에 한 판 10개월이 걸린다. “10개월의 긴장을 누가 견디겠는가”라고 반문도 했다. 현대 정신과학의 가설이 하나 있다. 의식을 한 차원 높게 계발(啓發)해 창의적인 수준에 도달하려면 ‘잘 고안된 집중’을 오랫동안 지속해야만 한다.

 - 승부 형식에 따라 바둑의 깊이도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리고 두 기사 모두 자신의 바둑을 알아 주는 것은 상대밖에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귀한 상대와 두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 그래도 승부인데 경쟁심이 먼저 아닐까.

 “아니, 자부심이다.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좋은 바둑을 남기겠다는 열망. 이세돌이 이번 승부만큼 대국 후 ‘내용이 좋지 않았다’고 자주 토로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은 진짜다.”

 - 명예도 좋지만 돈이 먼저 아닌가.

 “물론 돈 없이는 명예도 승부욕도 없지만…. 둘 다 역사를 인식하고 있다. 구리도 말하곤 한다. ‘100년 후 누군가가 우리의 바둑을 본다면…’ 그 인식이 힘든 10번기를 견디게 하는 듯하다.”

 - 견딘다? 두 기사 모두 지쳐가지 않을까.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齊·1919~93) 9단은 3차 10번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기원 탈퇴서를 가슴에 넣고 왔다’고 고통스러워했다. 지면 진짜 힘들 것이다. 4국이 끝난 뒤 저녁 자리에서다. 두 기사가 화기애애했다. 놀랄 정도였다. 이미 서로 42판이나 싸웠기에 그렇겠지만 이번 10번기에서는 상대를 더욱 격려하고 있는 듯했다.”

 51~52년 우칭위안과 후지사와는 2, 3차 10번기로 싸웠다. 소위 ‘세기의 대결’이다. 제한시간이나 절차 문제로 갈등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긴 승부에서는 승패에만 얽매이면 집착이 생겨 마음이 닫힌다. 멀리 보는 안목이 제한된다. 그러나 상대를 경애하면 곧 마음이 열린다. ‘상대 없이는 자신도 없다’는 인식이 온다.

 - 상금이 크게 걸리면 혹시라도 성품이 메마르게 되지 않나.

 “4국 때 밤에 후원사인 헝캉(恒康)가구회사 니장건(倪張根·37) 회장 방에서 맥주 서너 잔 가볍게 한 뒤 헤어질 때다. 두 기사가 포옹을 했다. 쉽지 않은 태도였다. 승부의 아름다움을 봤다. 두 기사는 실로 승부를 안다. 패배했을 때의 고통과 무서움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두 기사 모두 ‘지고 싶지 않다. 5승이 목표’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겼을 때 상대가 갖게 될 절망을 알고 있다.”

문용직 객원기자

◆박정상=1984년 서울 출생. 2000년 입단 후 2004년 제8회 SK가스배 신예 프로10걸전과 2006년 제19회 후지쓰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다.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를 졸업했으며 최근에는 바둑TV 해설자로 좋은 평을 얻고 있다. 솔직한 성품이며 바둑계 안팎에 시야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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