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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요놈 잘 걸렸다, 배추벌레 체포해서 휙휙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 일은 남들보다 세 배로 하고 하나밖에 못 챙기는 사람.

어찌어찌해서 들어본 내 사주다. 태어난 시간이 알쏭달쏭해 생년월일만으로 따졌단다. 이를 다른 말로 풀면 남들 거들어주다 제집 곳간 비는 줄도 모르는 자, 겉은 뭐가 있어뵈는데 실속 없는 자, 제배 곯는 줄 모르고 선심 써대는 자라는 건데, 이거 뭐 한마디로 허당이란 말이구나. 그런데, 내발로 가서 점을 치거나 사주팔자를 본 적이 없지만 이 양반이 족집게다. 여태 살아오면서, 눈 뜨고부터 자리에 누울 때까지 심심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쓸 데 없이 넓은 오지랖이다. 꼭 들어주지 않아도 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꼭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맬 때가 적잖다. 그런데도 월말이면 카드값 빵꾸날까봐 식은땀이 나니, 인생도 이런 꽈당 인생이 없겠다. 하루가 48시간도 아닌데, 아니다 싶은 일을 과감하게 때려치우지도 못 한다. 생김이 이러니 이제 도리 없다. 어차피 이번 인생 여기까지 굴러왔으니 욕심 버리고 눈앞의 재미나 찾으며 살아야지. 어쨌거나 밥은 굶지 않겠다니 그나마 위안이다.

이거저거 벌여놓은 많은 일 중에 그래도 해도 해도 지겹지 않은 일은 삽질이다. 어제 점심을 누구랑 먹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밭둑에 세 포기 심은 호박 새줄기에서 잎이 네장 째 나오고, 지난 가을 저절로 씨가 떨어진 참깨 한 포기가 오이 옆에서 한 뼘만큼 자랐고, 파밭에서는 새로 씨 부은 이십일무가 살이 오르고 있다는 게 눈감아도 떠오르니 말이다.
덥기 전에 일을 마치려 서둘러 밭에 나갔다. 일주일 만에 밭은 풀과 채소들로 꽉 찼다. 벌레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해, 상추 잎을 뒤집으니 군데군데 하얀 알이 깔렸다. 봄배추, 총각무, 열무, 케일, 양배추들에는 배추흰나비애벌레가 붙었다. 요놈들은 양배추 잎을 제일 좋아한다. 그냥 놔두면 수확이고 뭐고 없어 눈에 띄는 족족 체포해서 풀숲으로 휙휙. 한참을 구부렸다 일어나니 다리에 전기가 오고 눈앞에 물결이 흐른다. 팔뚝과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일을 마칠 즈음하여 용석 군이 철희 군과 함께 구룡산 능선을 타고 내려왔다. 석경 군, 세일 군, 놀러오라고 부른 중철 군도 느긋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점심때가 돼서야 여섯이 다 모였다. 굽고 마시고 낄낄대며 한나절이 갔다.
-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불콰해진 용석 군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모란동백’을 노래한다. 야 야 이 염병아 이게 뭐야. 뽕짝을 불러도 시원찮을 판에 눈물 나게 이게 뭐야. 서로들 희끗한 머리 보며 한 잔, 앞산 바라보며 한 잔...
-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채소봉지 들고 흥얼대며 길 내려가는 아저씨들 뒤로 그림자 길어진다.
-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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