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집무실 개조해야 ② 박근혜, 당장 결단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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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형식이 실질을 지배하듯 공간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참모가 500m 떨어져 있고, 대통령 혼자 운동장 같은 사무실에 있는 나라에서 소통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대통령들은 구중(九重)궁궐 깊은 곳에서 혼자 중요한 세상 물정을 놓치곤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 현철의 국정 농단이나 어려운 기업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흉흉한 민심을 몰랐다. 만약 청와대가 백악관 같은 구조였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대통령과 참모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훨씬 편한 분위기에서 민심이 화제에 올랐을 것이다. 참모들도 보다 편하게 아들 문제나 기업의 위험한 상황을 고언(苦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들이 한보그룹 돈을 받고, 그 회사가 부도나고, 삼미·진로·기아가 줄줄이 쓰러지면서 국가신인도가 흔들렸다. 여기에 금융권 혼란으로 달러가 바닥나면서 1997년 끔찍한 외환위기가 터진 것이다. 이 사태로 국가와 국민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이를 계산하면 수천억원을 들여서라도 대통령 집무실을 다시 지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집무실과 비서실의 거리에 따라 대통령과 참모진의 관계가 결정된다. 청와대처럼 참모들이 차를 타고 대통령에게 가는 건 ‘보고’다. 하지만 미국이나 독일·이스라엘처럼 방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협의’다. 대통령과 참모가 서로 불쑥 방에 들어가거나 아무 방에서나 모여 피자를 먹으며 협의할 수 있다.

 청와대 보고가 협의였다면 현대사의 많은 실패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참모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아들 ‘홍삼 트리오’를 둘러싼 싸늘한 민심을 말할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참모 방들이 옆에 붙어 있으면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이 감히 청와대에서 기업인의 돈을 받을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몇 걸음 걸어가 비서실장 방에서 참모들과 잡담했다면 말썽 많은 ‘형님’ 문제도 가닥이 잡혔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옆방에 건너가 참모들과 커피를 마셨으면 낯선 수첩 인사(人事)는 걸러졌을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평판은 보고가 아니라 협의에서 나오는 법이다.

 현대사를 보면 이처럼 청와대에는 ‘공간의 실패’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는 본관에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같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비서실 건물로 멀리 보내더니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아예 지금 같은 ‘유령 본관’을 지었다. 건국 후 43년 만에 거액을 들여 집무실을 신축하면서 개악을 한 것이다. 신축 당시 청와대 총무수석은 “천년을 두고 길이 보존해야 할 민족문화재”가 되도록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문화재는 포장이었다. 소통과 협의라는 효율보다는 대통령의 권위를 위해 외관과 규모만 웅장하게 해놓은 것이다. 이는 위용을 중시하는 군사문화가 잘못 적용된 경우다.

 대통령들은 이런 구조가 얼마나 잘못된 건지 잘 알았다. 그러나 생각은 공약이나 검토에만 머물렀을 뿐 실천된 게 없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탁상공론이었다. 경호나 의전,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비현실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는 비서실 건물에 대통령 사무실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는 대통령이 잠시 머무르는 간이 사무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고려할 대안이 못된다.

 청와대는 영원한 국가 중추 집무실이다. 통일이 돼도 변함없다. 수백 년의 국가 대계(大計)를 위해 근본적인 처방을 해야 한다. 방안은 둘이다. 현재의 본관을 개조해 핵심 참모진의 사무실을 집어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서실과 경호처 건물을 부수고 백악관 같은 밀집형 집무센터를 새로 짓는 것이다. 본관은 의전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 정권은 임기 후반에 이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정권의 동력이 약해지고 예산 부담도 버거워 추진하지 못했다.

 집무실 개조는 이미 정답이 나와 있다. 문제는 대통령의 결단이다. 대통령이 불편을 무릅쓰고 결정하면 국회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임자에게 미뤄선 안 된다. 당장 결단해야 한다. 짧게는 자신의 고립과 불통을 해소하는 일이다. 길게는 자손만대를 위해 국가 중추부의 숨통을 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