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지 않고 먹는 한약이 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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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약은 꼭 달여 먹어야 하는 것일까. 복용하기 간편하게 양 약화하면 약효가 달라지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관심은 우려 제약 계가 최근 너도나도 한약의 양 약화를 서두르면서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부쩍 높아지고 있다.
보사부가 집계한 연도별 한약 제 제의 품목허가 전수는 72년에 12가지에 지나지 않던 것이76년에는 1백41개 품목으로 늘어났고 77년에는 무려 3백1개 품목으로 급증, 우리나라에서도 한약의 양 약화「붐」이 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서는 이미 오래 전 정제 한약이「히트」한바 있다. 한약이 약탕관으로 달여 먹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정제·산제·과립· 「에키스」등 양 약과 같은 제형으로 점차 옮아가고 있는 것은 휴대와 복용이 간편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르는 당연한 변화다.
홍문화 박사(서울대 생약 연구소) 는『한방의 신비한 약효로 한방수요 인구가 국내외적으로 늘어가고 있고 한방을 과학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은 터에 한약의 현대화와 규격화는 약효의 보장과 보존 및 품질관리상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3백여 개 제약회사 가운데 1백여 개 사가 한가지 이상의 한약을 내놓고 있는데 특히 H제약·K제약 등은 전문적인 한방약「메이커」로 성장했고 일류「메이커」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경희대 한방병원에서도 종래 첩 약에서 탈피, 현대화된 제형으로 조제해 주고 있다고 동 병원의 구본홍 박사는 말했다.
한방약의 양 약화는 일본·대만·미국·서독 등에서는 우리 보다 훨씬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특히 대만의 허홍원 박사(대만 약대 교수)같은 이는 3백여 종의 한방약을 양 약화한 바 있다고 조기형씨(한국 만성질환 연구회 이사)는 소개한다.
이들 한약의 제조방법은 우선 한방처방 문헌에 따른 약초를 선별, 처방대로 배합한 이중가열 부에서 적당한 시간동안 달여 순수한 액(에키스)을 추출한다.
이「에키스」를 그냥 약으로 사용하는 수도 있으나 이를 진공에서 저온으로 냉각, 농축시키고 여기에 유 당 따위의 부 형제를 넣어 양 약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약의 양 약화에 따르는 문제점은 수두룩하다.
우선 가정에서 달이는 것과의 약효의 차이에 대한 병리·약리학적인 규명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농축시간·온도·조건 등 약효를 좌우하는 농축기술이 확립되어 있지 못해 똑같은 약이라도 제조회사에 따라 약효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국가가 인정하는 한방 처방 집이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점도 지적되고 있다.
일본이나 대만에는 성분·용량·용법·효능 등 구체적인 기준과 규격·정시변화·흡수·배설에 관한 시험방법을 국가에서 제청해 제약회사들이 이 기준에 따라 약을 제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기준이 없다.
이들은 또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서의 제형 근거가 있어야 하고 각개 성분을 정 성할 수 있어야 하며 1가지 이상의 성분을 정량 할 수 있어야 하는 등 현실적으로 모순되는 허가 조건 때문에 한약의 발전이 더욱 저해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K제약의 김광회씨는 한약은 감초·마 황 등 10여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정량분석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홍 박사는 일률적으로 성분 분석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농축액 전체를 분광 분석해 표준약제의 표준 곡선과 비교하는「패턴」분석법을 써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희대 약대의 유경수 박사는 사람에 따라 처방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양 약화하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종래의 전 근대적인 투약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무엇보다 급한 것은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한방의 이론을 과학화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일례로서 유 박사는 한방의 원전 중에서도 근거가 희박하고 잘못된 것이 많은데 이를 수정 보완하는 연구, 약리학적인 기전의 규명 등을 들고 있다.
어쨌든 한약은 자연적이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데다 그 치병 효과가 경우에 따라 합성의약품을 능가하고 있다는 증거가 뚜렷한 이상 우리로서는 양 약의 맹목적인 모방·답습에서 탈괴, 전통적인 우리의 약을 개발하고 수출하는데 학계와 업계가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홍 박사는 주장한다. <신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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