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김환관 - 해영무렵(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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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장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경은 그 정체파악이 덜되는 장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청관이 아닙니까.』
『살상.....업었어요, 아씨.』
『나를 구출해 내가려던 그 사내는 어찌되고?』
『감쪽같이 도망쳤어요』
『그래?』
『아씨! 당분간은 이곳에 유폐돼 계시는 편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르겠어요. 여기 계시는 동안엔 제가 옆에서 시중을 들겠습니다.』
경은 사실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샜다.
이번 귀국은 일시적인 것이지 아주 돌아온 것이 아니다. 청국 신제에게 간접으로 간청하기를 혼자 몸이 되고보니 고국도 그립고 또 울적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서도 잠깐 바람을 쐬고 싶으니 잠시 동안의 귀국길을 청허해 달라고 했었는데 뜻밖에도 선선히 받아들여져서 돌아온 것이다.
고국에 이런 큰 정변이 일어났고 생가가 그 일에 휘말려 멸문이 됐고 그런 험악한 때를 맞추어 멋모르고 귀국했기 때문에 이런 난감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니까 차라리 청관에 묻혀 있다가 기회를 잡아 다시 저 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몇사람 만나보고 싶을세.』
『누구를 말씀이세요.』
『김자점대감을 만날 수 없을까 몰라?』
『안만나시는게 좋을 걸요.』
『내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내게 도움을 줄 분인데....』
『그 분은 이번 일로해서 나처한 처지에 몰려 있습니다.』
『왜?』
『이번 일은 청나라와 내통이 돼있기 쉽고 그 중간 역할을 한게 김자점대감이 아니겠느냐고들 수군거리는 눈치인걸요. 그런 분이 아씨와 연관을 가져보세요. 단박 몰리고 말겝니다.』
『그렇다면 최명길나으릴 뵈어야겠군.』
『더욱 안될 말입니다. 그 분은 아씨와 마찬가지로 이제 막 자유의 몸이 됐는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지금 이 나라안에서 아씨에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기원 일당의 역모사건이 억울한 일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엔요.』
『그렇다면 간밤에 나를 업어가려던 괴한은 무슨 속셈에선가? 자네는 알고 있을게 아닌가.』
『그건 순전히 사정에 의한 의리입니다. 원인표 아시죠? 회은국 나으리의 총애를 받아왔잖아요? 아버님 모시고 심양에도 드나들었구요. 그 의리로 아씨를 빼돌려 이따 어디에서 조용히 지내시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던 줄로 압니다. 아씨로 하여금 사문에 들도록 하여 불도나 닦게 할 심산이었습니다. 이제 다 좌절되고 말았지만요.』
그런 말을 하는 장녀의 손을 잡고 경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유주현 김세종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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