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해빙 무렵(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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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주현 김세종 화
소위 감호사 마호의 몸종임에 틀림 없었다. 걸친 옷은 호복이지만 누가 봐도 그네는 조선 여자였으며 실제로 지껄이는 말이 서울 말씨였다.
『먼길을 오셨으니 오늘은 목물을 하시도록 하셔요. 제가 시중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의사를 묻는게 아니라 지시하는 말투여서 경은 가볍게 반발했다.
『무슨 소릴 하는겐가. 이런 곳에서 볼꼴 사납게 목욕을 하다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꽤 음전하게 생긴 여자가 눈을 핼끔 하더니 대거리를 하는데 조금도 위축된 말투가 아니었다.
『피로를 푸실겸, 하셔요. 욕탕 안엔 황국이 만발해서 그 향기가 황홀할 지경입니다. 국향이 몸에 골고루 스미면 울적과 비통도 한결 가실게니까요. 』
『자네도 같은 조선 여자이면서 어찌 그런 소릴 할 수 있는가. 어버이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고 수많은 친지들의 혈흔(혈흔)이 아직 굳지도 않은 이 참상 속에서 내 육신 돌볼 겨를이 어디 있으며 그런 망발을 권하는 자네의 속셈이 대관절 뭣인지 모르겠네.』
『감호사의 지시인걸요.』
『감호사의 지시?』
『그의 지시는 거역할 길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 청관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엔 살인이 나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이젠 산전수전 다 겪어온 경이라서 그 말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거역할 길 없다는 사실도 짐작이 가고 지금은 청국 황실과는 모든 인연이 끊긴 신분이니 그 사실을 짐작하고 마호가 흉측한 야욕을 품어도 저들의 풍속으로는 큰 망발이 아니다.
『나가 있게. 목욕까지 남에게 강요당할 수는 없는게 아닌가.』
경은 매몰스럽게 쏘아붙였으나 이미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자기 성씨가 장(장)가라고 한 장녀는 경의 몸을 부축하는 척 하더니 거의 강제로 욕실에다 집어 넣고는,
『제 차지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경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반항을 하겠는가.
『이 청관 속의 풍속은 정말 해괴망측합니다. 짐승들만도 못한 짓을 거리낌없이 해치우는 저들이고 그것을 말리거나 호소할 아무런 방도가 없어요. 저도 반명한 집안의 딸입니다. 처음 당할 때는 혀를 깨물고 죽으려했으나 죽는다는 게 그리 쉬운 노릇이 아니데요. 아씨도 별 도리 없으셔요. 지금 이곳에서 나가시면 정말 성명이 없어질 것인데 좋은 세상 만나실 때까지 그렁저렁 목숨을 이어가시는 게 좋지 않으셔요? 세월이 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 어떤 솟아날 구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머, 살갗도 고우셔라. 사내 손닿아본 이 없는 이제 막 봉오리진 꽃처럼 싱싱한 몸매이시네요. 어떻게 하면 젖무덤이 이토록 탱탱한 채 늘어질 줄을 모릅니까.』
정말 말도 많은 여자였고 어쩌면 같은 여자이면서 변태성의 괴벽을 지닌게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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