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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드라마 '밀회' 클래식 슈퍼바이저, 피아니스트 김소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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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연상연하. 게다가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던 음악계 실력자인 예술재단 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 분)과 가진 거라곤 피아노 치는 재능 밖에 없는 순수한 청년 이선재(유아인 분)와 사랑이라니. 여기에 상류층 사람들의 은밀한 속사정을 까발리는 대담함까지…. 13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밀회’(연출 안판석, 작가 정성주)는 파격적인 줄거리와 이를 풀어내는 세련된 연출력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았다는호평을 받았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피아노 선율이었다. 등장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적절하게 표현한 피아노 곡들은 시청자를 더욱 더 작품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선재와 혜원이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D940을 함께 연주하며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은 피아르가즘(피아노+오르가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였다.

‘밀회’의 클래식 슈퍼바이저인 피아니스트 김소형(41)씨를 만나 드라마 뒷얘기를 들었다.

김소형(41)

1973년 서울 출생
1989년 예원학교 졸업
199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뮤직김나지움 졸업
1994년 뮌헨국립음대 루드비히 호프만 사사
2000년 오스트리아 국립음대 학·석사 졸업(파울 바두라 스코다·올렉 마이센 베르그 교수)
2004년 오스트리아 국립음대 연주자과정 졸업
2005년 비엔나 비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으로 데뷔
2007~2009년 비엔나 슈베르트 음악원 피아노과 부교수 재직
현재 예술가비평협회가 지원하는 K클래식(K-Classi) 아티스트
 

사는 곳 : 판교 운중동
작업하는 곳 : 판교 자택
운동하는 곳 : 운중천 산책
장 보는 곳 : 판교 가락축산시장
자주 가는 식당 : 판교 맛있는 막창
좋아하는 작곡가 : 브람스·스크랴빈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 잉그리드 헤블러·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아르카디 볼로도스
 
가족

금융인 남편과 딸(5)

드라마 ‘밀회’에서 사랑에 빠져드는 선재(유아인)와 혜원(김희애)을 피아노 선율로 담아낸 장
면들. 맨 오른쪽 건반 위 손가락의 주인은 김희애의 손 대역을 맡은 피아니스트 김소형씨.

피아노 선곡부터 연주 지도, 대역까지 맡아
유아인, 사흘 만에 건반 88개에 손 정확히 놔
김희애 못생긴 내 손 보고 ‘예술가 손’ 위로
우아한 클래식 연주자의 저속한 사생활?
음악가는 삶 아니라 음악으로 평가 받아
‘밀회’처럼 소통하는 음악하고파

-국내 음악계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 드라마의 클래식 슈퍼바이저를 맡게 됐나.

“예원중학교(1986년 입학) 졸업 후 19년 동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공부했다. 게다가 2007년 결혼하면서 인생의 중심이 음악에서 가족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그러니 국내 인맥이 별로 없다. 비엔나에 같이 있던 지인의 소개로 한국 클래식 연주자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갔고, 그곳을 통해서 ‘밀회’ 제작진과 연이 닿았다.”

-‘밀회’에선 피아노 곡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던데. 클래식 슈퍼바이저는 무슨 일을 하는 건가.

“선곡에서부터 대역 연기, 연주 지도와 녹음 편집까지 음악에 관련한 부분을 전반적으로 책임지는 자리다. 대본이 나오면 훑어보면서 극 흐름에 맞는 곡을 선택한다. 물론 안판석 감독과 상의해 확정한다. 곡이 정해지면 전체 중에 어떤 부분을 따서 30초, 혹은 1분이나 5분 짜리로 만들어 어떻게 화면에 집어넣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 다음 대역이 연주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배우들에게 전하고, 그후 연습실에서 만나 배우들에게 피아노 치는 연기를 지도하는 식이다. 김희애의 피아노는 내가 직접 대역을 했고, 유아인은 피아니스트 송영민씨가 맡았다. 이게 다가 아니다. 대역도 배우랑 똑같이 계속 촬영 현장에 따라다녔다. 마지막 촬영일까지 서경대와 남양주 등을 다 돌았다. 나중에 곡을 따로 녹음하지 않고 모두 현장에서 촬영 직전 녹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배우는 그 현장 음원을 들으며 모션 연기를 하는 거다.”

-촬영 현장이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면 음향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결과가 나올 텐데 굳이 동시 녹음을 한 이유가 뭔가.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고집 때문이다. 안 감독은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워낙 디테일에 강한 사람으로 소문 나 있지만 정말 이 정도인지 몰랐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안 감독은 심지어 한 번 쓴 곡은 절대 재활용하지 않았다. 만약 14회와 15회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다면, 그때마다 녹음팀을 불러 연주 모습을 새로 촬영했다. 대충이 없었다.”

-작가와 감독 모두 클래식 음악에 상당한 식견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의견 충돌은 없었나.

“전혀. 정 작가는 전문가만큼 피아노 곡에 정통하더라.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등 몇몇 곡은 작가가 처음부터 대본에 지정한 것들이다. 안 감독도 클래식 애호가다. 안 감독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밀회’ 2회에서 선재가 혜원에게 재능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4월’을 연주했다. 대중적으론 ‘3월’이나 ‘6월’‘10월’이 더 유명하다. ‘4월’은 덜 알려진 곡이지만 나는 비엔나와 동유럽 느낌이 살아있는 ‘4월’을 좋아했다. 아무 설명 없이 ‘4월’과 ‘6월’‘10월’을 들려줬더니, 안 감독이 듣자마자 ‘4월 좋다!’고 외치더라. 그의 감성이 나와 딱 맞았다. 작가·감독이 날 믿어줬고, 그런 만큼 호흡도 좋았다.”

-선재가 처음 등장할 때 바르톡이 흐르던데.

“선재가 클래식 동호회 카페에 ‘나천재’란 아이디로 올린 유튜브 동영상 연주를 혜원의 남편인 준형(박혁권 분)이 우연히 보게 된다. 이때 선재가 연주한 곡이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의 피아노모음곡 op.14 번 중 3번 알레그로 바르바로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의 천재 주인공의 등장이 강렬해야 했기에 고른 곡이다. 바르톡은 민속음악 색채가 도드라져 보다 거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극 전개상 이 장면을 통해 건초염(손을 많이 쓰는 사람이 주로 앓는 질병)을 앓았던 혜원이 선재 역시 건초염을 앓는 아픈 손을 알아봐야 했다. 이 곡은 긴 음표가 나와서 2초 정도 멈춘 채로 손가락을 비출 수 있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에도 딱이었다.”

-배우 얘기를 좀 해보자. 곁에서 지켜본 유아인 모습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유아인 색깔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천재를 표현하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실제 천재 피아니스트라면 천재인 척을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입을 오므린다든가 얼굴의 특정 근육을 움직이는 유아인 특유의 모션을 살렸다. 유아인에게 숙제, 다시 말해 대역의 연주 영상를 주고 사흘 후에 만났는데 정말 똑같아 깜짝 놀랐다. 대역보다 더 피아니스트 같을 정도였다. 피아노 건반 88개에 손을 정확히 놓았다. 피아노 연기가 점점 발전해 나중엔 따로 레슨할 필요도 없었다.”

-유아인의 실제 피아노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잘 치진 못한다. 촬영 한 달 반 전까지는 김희애·유아인과 레슨실에서 만나 무작정 하루에 4~5시간씩 보냈다. 첫방(3월 17일) 2주 전에야 비로소 틀이 잡혔다. 솔직히 처음엔 유아인에게 별 기대를 안 했다. 접해보니 별로 말은 없는데 아주 대찬 데가 있더라. ‘그냥 하지’라는 식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를 인천시향과 촬영하는 장면을 너무 뻔뻔하게 해냈다. 촬영 전 ‘어떡하지’라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대본이 늦게 나와도 항상 태연했다. 유아인은 자기 안에 가진 캐릭터 색깔이 많다. 또 나이에 비해 예술적 감성이 깊고 풍부하다. 피아노 실력과 무관하게 유아인의 모션 연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자기 감정을 음악에 실어 만들어 내니까. 유아인은 마지막 촬영 때 현장에 온 정성주 작가에게도 ‘피아노 연기가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더라. 예술적 감성이 음악연기로 표출되니까 힘들지 않은 거다.”

-반면 김희애의 피아노 모션 연기는 좀 어색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밀회’에서 김희애·유아인이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D940을 연주하는 장면.

“난 그런 지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장면을 두고 그런 말들을 하는 모양인데, 난 전혀 다르게 봤다. 이 장면에서 혜원의 마음이 선재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김희애는 혜원의 감추어진 열정과 꿈을 얼굴로 표현해야 했다. 그걸 김희애만큼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모션 연기는 단순히 진짜 연주하는 것을 똑같이 재연하는 게 아니다.”

-김희애 대역을 직접 했는데, 화면 속 자신의 손이 어떻게 보이던가.

“내 손은 심줄·뼈가 많이 튀어나오고, 옆으로 큰 편이다. 슈베르트의 판타지아 듀오를 하는 장면을 보고 솔직히 충격받았다. 전혀 여성스러운 손이 아니었다. 방송 후 ‘늙은 사람 손인 줄 알았다’는 댓글까지 올라왔다. 김희애에게 무척 미안했다. 손도 신체의 일부인데, 예뻐보여야 한다는 걸 간과했다. 5회 촬영에 들어갈 때 손에 메이크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오히려 김희애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달리 예술가의 발이겠는가, 못생겨도 아름답다’며 나를 위로했다. 그 말에 감동받았다.”

-김희애에 대해 좀더 얘기해달라.

“여배우라면 촬영 때 예뻐 보이는 얼굴 방향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내가 본 바로는 김희애는 오른쪽이 더 예쁘다. 그러나 한 번도 그걸 고집하지 않더라. 프로 의식이 뭔지 많이 배웠다.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이다.”

-불륜 소재에 클래식 음악을 입히는 게 혹시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클래식을 왜 저속한 이야기에 갖다 붙이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건 편협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클래식은 우아한 사람뿐 아니라 모두의 삶에서 나온다. 브람스·쇼팽·슈베르트·베토벤 등도 인간의 삶, 한발짝 안에 있었다. 리스트는 연상의 백작부인을 사랑하며 곡을 썼다. 모차르트도 지탄받지 않을 삶을 살아서 그런 훌륭한 음악을 만든 게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클래식 음악계의 치부를 꼬집은 것 역시 조심스러웠을텐데.

“이 드라마 보면서 뜨끔한 사람이 많았을 거다. 하지만 거꾸로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유럽의 한 유명 연주자는 사생활에 관한 소문이 안좋고 다들 그걸 알지만 개의치않고 그의 연주회에 간다. 음악가의 삶이 아니라 그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음악가뿐 아니라 누구라도 남이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삶은 없다.”

-본인 스스로는 어떤 음악가의 삶을 살고 있나.

“20대의 나는 다혈질에 에고가 강했다. 음악이 내 인생의 갑이었고, 나머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내 커리어에 걸림돌이 될 거라 여겼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벗은 후 집에 가면 공허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게 마약 같아서 또 다른 무대를 준비하게 된다. 그런 나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삶이 180도 바뀌었다. 내 인생에서 사랑이 갑이 됐다. 음악이 전부가 아니더라. ‘예술의전당 무대에 설 건지, 살롱에서 소통하는 음악회를 할 건지’를 물으면 난 후자를 선택한다. ‘밀회’ 살롱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정성주 작가가 마지막 촬영 현장에 와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들에게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라’는 유언을 남기겠다고 하더라. 오래 기억할 말이다.”

글=장상용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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