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 밖의 겨울>(2)-조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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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어, 소리들은 반복 고조되고
소리들은 화살로,
실장의 전신에 사정없이 박히고
화살 맞은 맹수처럼
그렇게 광기로 포효하는 실장.
(사이)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의 시선과 타이피스트의 시선이 마주치는 동안 실장 앞에 나란하게 정돈하여 서는 수습사원들)
타이피스트-시작하십시오.
수습사윈B-네. 저는 강아지한테 물려본 과거는 있습니다마는 강아지를 귀여워 해본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네 강아지가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는지 솔직히 말씀드려 모르고 있습니다. 네.
실장-감사합니다.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불어 미래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습사원B-물론입니다. 실장님, 그래서 앞으로는 강아지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장님.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사이)
수습사원B-네.
실장-순간적인 현재. 그것은 전혀 존재치 아니합니다.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그렇습니다. 미래라는 것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습사원B-미래?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원B-네.
실장-네. 미래.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그럼 현재입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우리는 과거에 있습니다.
수습사원B-네.
실장-그렇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과거는 꿈과 같이 존재로부터 미끄러져 없어진 것입니다.
수습사원-틀림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강아지가 사람의 말을 잘 듣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원B-네.
실장-들립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보입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들립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보입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무엇입니까?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무슨 소리입니까?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몇 살입니까?
수습사원B-네.
실장-주민등록번호는?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강아지.
수습사원B-네.
실장-보입니까?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들립니까?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무엇입니까?
수습사원B-아이오.
실장-강아지!
수습사원B-강아지를 키우겠습니다. 실장님!
(사이)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윈B-물 좀 주세요.
실장-화장실에 가시면 두개의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그 한쪽을 입에 물고 빨아보십시오. 그러면서 생각해 보시오. 강아지와 당신의 관계.
(그러면서 갈증처럼 웃고 서있는 실장 그 뒤로, 습기를 찾아 퇴장하는 수습사원B.)
타이피스트-실장님!
(그 갈증으로 웃음을 점지하는 실장, 그런 갈증을 예감하며 꼼짝없이 서있는 수습사원 A·B.)
실장-내가 나에 관해서 내린 판단은 내가 그것을 내릴 때에는 이미 나는 다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습사원C-저도 그렇습니다. 바둑이 말고도 셰퍼드란 놈을 길러 보았는데 그 놈은 역시 제가 지시한 판단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원C-네.
실장-따라서 내 스스로가 나의 과거 속에 갇히지 않는 방법은 내 스스로가 나의 과거인 한에 있어서입니다.
수습사원C-그렇기 때문에 셰퍼드에겐 쉬운 것부터, 아주 쉬운 것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입에 물어라, 그것을 놓아라, 물어라, 놓아라….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원C-네.
실장-입에 물었습니까?
수습사원C-입에 물었습니다.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수습사원C-네.
실장-놓았습니까?
수습사원C-(타이피스트를 의식하며) 네.
실장-이것을 입에 물어보십시오.
수습사원C-(서류철을 입에 문다.)
실장-놓았습니까?
수습사원C-네.
(입에 물었던 서류 쪽지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이력서, 주민등록표, 입사원서… 황급히 그것들을 주워 모으려는 수습사원C, 그 손등을 장난처럼 밟아보는 실장, 그 위에 부착된 그들의 표정이 비상을 포기 당한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고있다.)
실장-여기 두개의 못이 있습니다.
수습사원C-네.
실장-이 두개의 못은 아주 같아 보입니다.
수습사원C-네.
실장-이 두개의 못을 나무에 대고 망치로 때리면 하나는 제대로 들어가겠죠?
수습사원C-아! 제 손등입니다.
실장-하나, 즉 구부러졌던 것을 편 못은 나무에 대고 망치로 때리면 다시 구부러지겠죠?
수습사원C-실장님!
실장-그것은 무엇입니까?
수습사원C-실장님!
실장-그것이 곧 과거의 작용입니다.
수습사원C-실장님!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실장-과거의 작용, 과거의 작용! 구부러진 못은 버립시다.
수습사원C-실장님.
(디딤돌처럼 흩어진 서류 위로만 맴돌던 실장이 멈춰 서자 그 마지막 한 모서리를 붙들고 실장의 성큼한 키를 올려다 보고있는 수습사원C. 그 표정 속엔 급한 용변에 대한 인고가 넉넉하다.)
실장-용변장에서 당신은 늘 당신의 과거를 제거해 버리는데 용이했습니다. 아직 폐쇄되지 않은 용변장이 저 문밖에 있습니다.
수습사원C-네.
(실장이 밟고 서있는 서류의 한 모서리가 조심스럽게 찢어지고 있는 소리. )
그 소리들을 무슨 음모처럼,
그러니까 수습사원A는 아까부터
그런 갈증과,
그런 습기의 욕망과,
그런 음모의 예감으로 체감하는
자신의 중량을 견제하듯
그렇게,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미동하였다.
팽팽히 맞선 줄을 당기 듯
서류의 한 모서리를 찢어들고 물러나간 수습사원C의 행방으로,
그 힘에 이끌리듯 미동되었다.
실장-시간은…. (갑자기 빨라지는 타자기 소리.)
수습사원A-네. (정지되는 타자기 소리.)
타이피스트-지시한 주의사항을 명심하십시오.
실장-시간은….
수습사원A-네.
실장-시간은 앞으로.
수습사원A-네.
실장-시간은 앞으로 내가 있고 싶어하는….
수습사원A-네.
실장-시간은 앞으로 내가 있고 싶어하는 곳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킬 것입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시간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킬 것입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나는 나의….
수습사원A-네.
실장-나는 나의 육신을….
수습사원A-네.
실장-나는 나의 육신을 존재시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나의 육신은 당신에 의해서….
수습사원A-네.
실장-나의 육신은 당신에 의해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나는 당신에 의해서 내가 인식되고 있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당신은 역시 나로 인하여 여기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완벽한 친구.
수습사원A-네?
(사이)
(무엇인가를 재촉하듯 빨라지는 타자기 소리)
실장-눈을 뜨시오.
수습사원A-네.
실장-보입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들립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보입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들립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눈을 뜨시오.
수습사원A-네.
실장-눈을 뜨시오!
수습사원A-네.
실장-입에 물었습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놓았습니까?
수습사원A-네.
실장-걸어보시오.
수습사원A-네.
실장-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강아지.
수습사원A-네.
실장-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수습사원A-네.
실장-강아지!
수습사원A-네.
실장-강아지! 개의 새끼! 강아지! 나가서 대기하시오!
(사이) <계속> 【조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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