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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잡고 비만 밟고 … 도심 속 스파이더맨 20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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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3면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 김자인(26)이 암벽에 오르는 모습. 원으로 표시한 손목과 발목, 등 근육은 든든한 지지대 역할을 한다. 중력을 거스르며 온 몸을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상체 근육이 발달하고, 동시에 하지 근력도 키울 수 있다. [중앙포토]

#1. 정보기술(IT) 관련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홍원표(48)씨는 일주일에 3번 정도 퇴근 후 서울 옥수동 실내 암벽장으로 향한다. 높이 3m, 폭 15m의 벽에 한번 붙으면 10분가량 내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3시간 동안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질 때까지 벽을 오르내린다. ‘대회에 나가 1등을 하겠다’거나 ‘식스팩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는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벽에 붙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스포츠클라이밍의 세계

 “벽에서 내려오면 ‘더 이상 못 올라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까지 해요. 매번 그렇지는 않고 일주일에 하루 정도만 그렇게 합니다. 루트상의 가장 어려운 지점을 ‘크럭스’라고 하는데요. 크럭스 지점에 설 때 느낌이 좋아요. 긴장감과 함께 도전,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막 솟거든요. 또 스포츠클라이밍은 하나의 루트를 하고 나면 곧장 더 어려운 루트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운동에 비해 성취감이 최고입니다.”

 그는 ‘5·12급’ 클라이머다. ‘5·10급’이 수직벽에 입문하는 첫 단계, ‘5·15급’은 지금까지 인간이 개척한 암벽 등반 그레이드의 최대치이니 동호인치고는 수준급 클라이머인 셈이다. 대학 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했지만 일 때문에 등반을 그만뒀고, 20년 만인 지난해 다시 스포츠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스포츠클라이밍을 시작하고 술·담배를 끊었어요. 벽에서 10분 정도 매달려 있으려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 어렵습니다. 몸도 좋아졌죠. 1년 만에 몸무게가 4㎏ 빠졌고, 근육량은 2배가 늘었어요. 물론 체지방은 줄었고요.” 홍씨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도전·성취라는 생각을 일깨워 줬다”며 “아내도 같이 스포츠클라이밍을 하는데, 서로 빌레이(등반자의 확보를 보는 행위) 보며 하니까 부부간에 신뢰도 쌓게 됐다”고 말했다.

 #2.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이현숙(43)씨는 거의 매 주말 산에 간다. 서울 북한산 인수봉, 전북 고창 선운산, 강원도 원주 간현암 등 전국의 바위를 찾아다닌다. 또 주중에는 두세 차례 실내 암장을 찾는다. 3년 전 우연히 실내 암장에 들른 것이 이제는 생활의 전부가 됐다.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을 때 가까운 실내 암장에 찾아간 게 시작이었어요. 작은 공간에서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멈출 수 있어요. 예전 스포츠클라이밍은 산악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됐는데, 요즘은 오히려 직장인들을 위한 도시적인 운동이 된 것 같아요.”

 이현숙씨 역시 건강이 좋아졌다. “운동 시작하고 1년 후 건강검진 진단 결과를 받아 보니 내장 비만수치가 줄었더라고요. 허리도 1~2인치 정도 줄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를 보고 스포츠클라이밍 시작하는 친구들도 있답니다.”

 스포츠클라이밍이 실내 암장 붐을 타고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 암벽장은 약 200개, 동호인 숫자는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10년 전에 비하면 동호인 수가 10배가량 늘었다. 대한산악연맹에 등록된 1600여 명의 선수 중 스포츠클라이밍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5%도 안 된다. 열에 아홉은 순수하게 운동을 즐기는 동호인이다.

 특히 40~50대 직장인들의 수가 늘었다. 스포츠클라이밍연구소 손정준(48) 소장은 “건강을 위해 찾는 40~50대, 특히 요즘에는 바위를 타고 싶은 여성분들이 실내 암장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스포츠클라이밍은 자연벽에서 이뤄지는 등반행위를 인공 암벽으로 가져와 스포츠로 발전시켰다. 인공 벽은 다양한 경사도 구성할 수 있으며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딜 수 있는 홀드를 보다 다채롭게 설치할 수 있어 자연 벽보다 더 박진감 있는 오름짓을 할 수 있다. 자연벽보다 훨씬 더 어렵고 재미있는 루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최초의 인공 암벽은 1968년 영국의 리즈대학 체육관에 설치됐으며, 국내에서는 88년 서울의 등산장비점에 설치됐다. 초창기에는 암벽 등반가의 트레이닝을 위해 설치됐으나 요즘은 다이어트나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직장인에게 인기가 높다.

헬스장 식스팩과 차원 다른 근육 선사
인공 암벽 등반은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는 운동이다.

 “벽에 매달려 발로 체중을 지지하고(supporting), 끌어올리는(lifting) 동작을 통해 상체 근육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불안전한 암벽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이뤄지는 발목의 움직임을 통해 하지 근력과 평형 감각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미국에서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클라이밍이 분노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결과도 있어요. 벽을 오를 때 생기는 긴장감과 불안,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이 성취감과 자기만족감 등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특히 우리나라 중년 남성은 비만 정도가 높은 편인데, 유산소운동과 더불어 근육량을 올릴 수 있는 운동으로 스포츠클라이밍만큼 좋은 것은 없지요.” 손정준 소장의 말이다. 그는 스포츠클라이밍과 관련해 국내에서 첫 번째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가 수강생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클라이밍을 오래할수록 체력과 심혈관 기능, 인슐린 저항성이 향상되거나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예쁜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요. 클라이밍 하는 사람들은 보기에는 말라 보이지만 옷을 벗으면 다릅니다. 헬스장에서 만드는 식스팩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올림픽 채택 땐 한국 메달가능성 높아
우리나라 스포츠클라이밍의 역사는 서구에 비해 늦게 시작됐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세계 정상급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국내 대회를 휩쓴 김자인(26·더 자스산악회)은 수년째 여자 세계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또 김자인에게 가려 유명세는 덜하지만 민현빈(25·아디다스클라이밍팀) 역시 남자 세계랭킹 6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자인과 민현빈은 성별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운동한 오랜 친구다. 또 둘 다 키가 작다. 김자인은 1m53㎝, 민현빈은 1m62㎝다. 손가락 몇 개로 홀드에 매달린 채 체중을 이동시켜야 하는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짧은 팔다리는 불리하다. 반면 특유의 근성으로 세계대회에서 서구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아디다스컵 선수권대회에서도 남녀 일반부 난이도 부문에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은 2020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쉽게 탈락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이내믹한 경기 장면을 잡아낼 수 있어 방송용으로 적합한 스포츠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종목에 포함된다면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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