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오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어제 홍수환이가 싸운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은 꼭 교훈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제2「라운드」에서 홍수환이가 세 번째 「다운」되었을 때다. 「아나운서」는 그만 『역부족입니다』며 안타까운 탄식을 했다.
다시 네번째 「다운」되었을 때 「아나운서」의 말투는 벌써 승부는 끝난 듯 했다. TV화면에 비친 쓰러진 홍 선수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도 제3「라운드」에서의 통쾌한 역전극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칠전팔기」란 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칠전팔기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를 상징하는 굴러대가선의 시조라는 보시달마 대사에서 나왔다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칠전팔기는 아니더라도 사전 오기의 멋진 본보기를 어제 「텔리비젼」 시청자들은 본 것이다. 지난 75년3월 「사모라」에게 어이없이 KO패 했을 때 홍수환은 얼마나 실의에 잠겨 있었던가. 그러나 그 자신에게는 오히려 좋은 시련기가 되었는가 보다. 정말 인간 만사새옹지마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무엇이 길이 되고 무엇이 흉이 되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가 쉽게 「타이틀」을 방어해 나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는 기회는 끝내 얻지 못하고 말았을 게 틀림없다.
「카라스키야」는 제2 「라운드」에서 홍수환을 네번이나 「다운」시킬 수 있었던 게 오히려 화가 되었다.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까지 붙은 KO의 명수인 그다. 방어는 다 끝난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게 『천처의 일실』이었다. 그는 제3 「라운드」를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더우기 그는 또 하나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있었다. KO로 이기는 자는 KO로 쓰러지기 쉽다는 사실을―. 그것은 「링」밖에서나 안에서나 마찬가지 일이다.
어제 싸움에서 탄생한 새「챔피언」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들을 보여준 동시에 스스로 탈환한 「타이틀」이외에도 얻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첫째 승부의 세계란 매우 냉혹한 것이다. 여기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주먹 하나뿐이다.
그리고 또 행운이 따라야 한다. 이번에도 행운이 홍수환을 편들은 바 많았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는 없다.
앞으로 더욱 전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싸움에 져도 상관이 없다.
그는 우리가 바란 만큼 싸워 주었고 자신에게도 그 이상 한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얼마나 그가 멋지게 「타이틀」을 지키다 물러나느냐가 남아 있을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